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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드백프로 Jan 02. 2023

그 외국인은 SRT가 아닌 KTX를 타야 했었다

대한민국에서 영알못으로 살아가기


눈이 유난히도 펑펑 내리던, '22년 12월 15일 목요일의 이야기이다.


연차였던 그날은 급히 대구에 다녀와야 할 일이 있었다. 늘 큰 도움을 주셨던 차장님(현재는 팀장님)의 모친상 소식에 KTX 표를 급히 끊었다. 동대구역에서 약 1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장례식장이 위치했었는데, 생각보다 버스가 많이 막혀서 약 40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서울에서 대구까지가 약 1시간 35분인데 말이다.


머리를 굴려야 했다. 서울에서 오후 8시 즈음에 당근 거래를 앞두고 있었고, 올라가는 표를 아직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서로 올라가는 SRT를 잽싸게 예약하고, 장례식장 앞에 있는 카카오 바이크를 확인한 뒤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팀장님을 비롯해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오랜만에 보게 된 반가운 분들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기차표 시간이 빠듯해서 짧게 인사를 드리는 것에 대해 팀장님은 따뜻한 표정으로 "조심히 올라가, 와 줘서 고마워"라고 말씀해 주셨고, 다음에 서울에서 뵙기를 기약하며 아까 봐 둔 카카오 바이크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향했다. 계산한 한대로 약 15분 만에 동대구역에 도착했고, 무사히 수서행 SRT에 탑승했다.




내 표는 서울에서 대전까지는 좌석, 대전부터 수서까지는 입석이었다. 대전에 가까워지자 입석으로 옮기기 위해 기차와 기차 사이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대전역에 도착하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외국인이 매우 큰 트렁크를 들고 힘겹게 SRT에 탑승했다. 기차 사이에는 트렁크를 넣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입석칸에 있었던 한국인의 도움으로 트렁크를 잘 적재한 외국인(편의상 R이라고 부르겠다.)은 왼쪽 문을 열고 좌석을 찾아 들어갔다.


서있는 시간에 유용한 '팟캐스트(매불쇼)'를 듣고 있는데, 귀에 꽂힌 에어팟 프로 사이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좌석을 찾기 위해 6호 차로 들어갔던 R이 자기 좌석이 없다며,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통로에 나왔다. R의 트렁크에 손을 내밀었던 한국인 K가 이유를 영어로 물었고, K는 R에게 표를 보여달라고 했다.


표를 본 K는 이 기차는 KTX가 아니라, SRT 임을 알려줬고.. 순간 분노한 R은 애꿎은 트렁크 정리함을 거세게 두들기며 (손 아프겠다..) 화를 내기 시작했다.


(영알못이지만, 주요 단어 몇 개와 그들의 표정과 상황으로 추측한 내용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R이 화를 내며 쓰던 말은 영어는 아니어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략 "아놔!! 이See..망했!!!" 이런 느낌이었다. K는 스마트폰으로 급하게 무엇인가를 조회했다. 수서행 SRT의 다음 행선지를 조회하고 있었는데, 천안 아산역에서 내리면 R이 타야 했던 KTX를 환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K는 확인한 내용을 R에게 유창한 영어로 알려주었고, 나는 무엇보다 K가 쓰는 유창한 영어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천안 아산에서 내려서 KTX를 타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R은 안도한 표정으로 이내 감사를 표하며, 본인이 내일 새벽에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며 시간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매우 놀래서 화를 냈음을 웃으며 말했다.


나도 뭔가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 K에게 오늘 눈이 많이 와서 기차들이 지연될 수 있으니 그럴 경우에 천안 아산역에서 승무원을 찾으시라는 이야기를 전해드렸고, K는 R에게 친히 번역을 해주었다. R은 감사를 표했다.


천안 아산역까지 가는 길에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나는 문득 '이게 최선인가?'라는 생각에 빠졌다. 눈이 워낙 많이 와서 이 기차도 중간중간 지나가는 역의 도착시간이 늦춰지는데, 저 짐을 들고 천안 아산역에서 외국인이 KTX로 환승을 한 다라... 그리고 내가 말한 승무원을 찾는 것도, 말이 쉽지, 내가 그 외국인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고객센터를 통해 천안 아산역의 번호를 알아내, 천안 아산역으로 전화를 걸었다. 역무원이 전화를 받았고, 나는 그 외국인의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대전에서 KTX를 타야 하는 외국인이 SRT에 잘못 탑승했고, 오늘 새벽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그 기차를 꼭 타야만 하며, 눈이 심하게 내려서 기차들이 연착하는데 외국인이 큰 짐을 들고 환승하기가 렵다는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말했다.


다행히 친절한 역무원은 내 이야기에 동의했고, SRT 호차와 현재 있는 위치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K를 통해 R에게 이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R은 직접 역무원이 본인을 픽업하러 온다는 말에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으며, 고맙다는 말에 "Welcome!" 이라는 (다행이 You are는 안 붙였다) 말을 하고는, 구글에 틀리기 답을 한 건지 찾아보았다. 이윽고 천안 아산역에 도착했고, 역무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R에게 구글에서 찾은 짧은 영어를 던졌다.


Have a nice trip!




사실 내가 그렇게 그 외국인을 위해서 노력을 한 것은, 늘 마음이 걸렸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적어도 최소 12년은 더 지난 아주 예전 '동대구역'에서 본인의 행선지가 적힌 종이를 보여주며, 버스 번호를 묻는 외국인이 있었다. 길치에 영알못인 '드백'이었지만, 주위에 사람이 나밖에 없던 터라, 손짓 발짓 끝에 버스 정류장 위치를 직접 알려줬고, 그 외국인은 연신 "Thank you"를 외치며,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버스 타는 곳이 여기가 아니라, 길을 건너였구나.. 암 쏘 쏘리...


그때 싱글벙글 웃으며 버스를 탔던, 그리고 가도 가도 목적지가 나타나지 않아 매우 당황했을 그 외국인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하며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 오늘의 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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