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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kmo May 17. 2022

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고 있는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를 때, 난 세상에서 가장 뻔뻔하고 대담한 사람이 되고,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된 순간부터 난 한없이 작아지고 다른 위대한 이들을 존경하기 시작한다. 전자의 사람들과는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답정너"로 치부하여 더 이상 나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관심을 최대한으로 줄이게 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는 별것 아니라며 쉽게 넘기면서 남의 잘못을 크게 떠벌리기 일쑤고, 대부분 목소리가 굉장히 크고, 혹시라도 상황이 불리하거나 불안감이 엄습해오면 몹시 성급하게 행동하고, 그 순간의 기억을 방어기제의 도움으로 자연스럽게 지워버린다. 이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이 나중에 그 상황을 설명해봤자 기억을 못 하고 별것 아니라고 넘겨버리는 일이 대부분이다. 상처를 쉽게 받는 것이 잘못된 일인 양 취급받는다. 공감 없는 삶이 자신을 천천히 씹어 잡아먹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공격을 받아줄 희생양을 승냥이처럼 찾아 돌아다닌다.


자아 통찰이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찾고 난 후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어느 순간 내가 옳다를 내려놓고 나는 실수를 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게 되는 순간이 내가 깨지는 순간이다. 이래서 오래전부터 선인들께서는 늘 겸손하라고 하셨나 보다. 보통 다른 사람들의 말은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내 가까운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무시하는 일이 오래된 습처럼 자리 잡았던 것 같다.




"확신은 어떻게 해야 생길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사실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답을 찾으시면 저에게도 알려주시겠어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드라마를 보다가. 이런 진솔한 대답과 질문에 나도 모르게 경외심이 생겼다. 진정한 대가는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구분하고, 모르는 주제에 대해서 어렵게 아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모른다고 인정하고 다시 겸손하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존재들이 아닐까? 그것이 내 전문분야와 다른 이의 전문분야를 나누고 서로 존경심을 가지고 협업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첫걸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단 음악뿐이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이런 협업 분위기로 어려운 문제들이 풀 수 있는 분위기가 점점 더 필요한 것 같다.


공감, 존경, 경청의 바탕에는 나라는 에고를 정확히 파악하고 인정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보통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내가 그동안 상처받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놨던 거짓 자신과 마주하는 일만큼 피하고 싶은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내가 가진 이상의 것을 알고 이해하려면 나의 한계를 똑바로 인지하고 바라보고 인정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렇게 나를 깨뜨리라고 했나 보다. 하물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도 껍질 깨는 이야기를 너무 아름답게 묘사하지 않았는가?

 

어떤 이들은 말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말보다 다른 방법을 이용하곤 하는데, 보통 음악가들은 음악으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시인들은 말보다 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때론 침묵으로 감정을 전달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다고 한들, 받아들이 입장이서 이것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기대 없이 나를 조용히 표현하는 것이 내 인생을 보람 있게 살다 가는 것은 아닐까? 나는 사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보다 사람의 의도를 먼저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그 의도가 불순할 때에는 거리를 두기도 한다. 어렸을 때는 성선설을 믿고 살았다면, 인생을 반을 지나고 나니 성악설이 기본이고 악한 사람 중에 선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인지 선한 사람들을 주변에 발견하면 너무 반가워  그 인연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아지는 것이 당연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인연은 그만큼 소중한 법이니까.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새로운 인연에 대한 이야기까지 온 것을 보면 역시 내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나의 세상에 갇혀 소통이 힘들면 점점 아집과 에고는 강력해지고 세상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게 되니까. 오늘도 마음을 열고 낯선 타인에게도 따뜻한 한마디 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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