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테이블 상판이 앞으로 보이게 누웠고, 그 위로 빼꼼 두 개의 인형이 솟았다. 하나는 댕기 머리를 한 꼬마, 하나는 정신없이 뻗친 머리를 한 도깨비였다. 클레이로 만든 얼굴에 손바느질 한복을 입은 모양이 여느 전시관에서 본 것처럼 정교했다.
사실 직접 누인 사람이나 테이블 상판이라고 알아채지, 보는 사람들에게는 무대였다. 나무 그루터기가 자리한 흙길과 장독대가 놓인 풀밭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었으니까. 그림 왼쪽 옆에는 ‘깜박깜박 도깨비’의 공연 제목과, 오른 옆에는 ‘책 읽어주는 엄마아빠’의 주최 단체명이 쓰여있어 무대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날은 제주 중산간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의 생일이었다. 이 학교는 개교기념일에 쉬는 대신 생일파티를 했는데, 방과 후 운동장에서는 학부모들이 생일파티를 마련했다. 그 파티 프로그램 중 하나로 학부모독서동아리 ‘책 읽어주는 엄마아빠’에서 준비한 ‘깜빡깜빡 도깨비’ 인형극이 공연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고.
엄마들이 준비한 인형극이라고 해서 시시할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이런 분이 필요하다고 주문을 외울 때마다 램프의 지니처럼 짠하고 전문가 학부모가 등장했다. 한복 전문가께서 직접 인형과 각종 소품을 만들어주셨고, 화가께서 무대를 그려주셨다. 해설에는 자작곡 노래가 더해졌는데 이 역시 음악 전공자분이 맡아 주셨다. 전체 감독은 동화구연 전문가께서 담당하셨고. 물론 꼬마 역할을 맡은 나는 배우 경험 전혀 없는 비전문가였지만, 평소 목소리가 낭랑하다는 소리를 즐겨 들었으니 연습으로 채워보리라.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모여 연습하고, 밤에 아이를 집에 두고 나와 연습했다. 과장해야 하는 목소리 연기가 부담스럽고 계속 인형을 흔들어야 해서 팔이 아팠고 쪼그려 앉느라 다리가 아팠지만, 이왕 하는 것이라면 잘해보자는 마음을 모았다.
수십 명의 어린이가 무대 앞에 모였다. 더 잘 보기 위해 무릎을 세우고, 앞 친구의 머리를 피하려고 고개를 요리조리 움직였다. 호기심을 잔뜩 품은 눈빛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두 개의 인형에게 닿았다. 함께 웃고, 노래하고, 안타까워했다. 해설까지 포함해도 배우가 세 명이라 허전할까 걱정했지만 관객이 또 다른 배우가 되어 공연은 풍성해졌다.
총 2회에 걸쳐 진행된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특히 2회 차에는 병설 유치원 어린이가 전부 나와 공연을 관람했는데 순수한 기대로 빛나던 맑은 눈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공연이 끝나고 소감을 메모지에 남겨달라 했더니 ‘머무 웃겼다’고 쓰고 간 1학년, ‘의외로 재미있었다’고 쓴 6학년, ‘재밌고 신나요 좋아요’라고 남긴 3학년 등 재밌다는 말로 가득 찬 소감판이 들썩였다.
올해 어쩌다 보니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학부모독서동아리 ‘책 읽어주는 엄마아빠’의 회장을 맡게 됐다. 지인이 나를 추천했을 때,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마다하지는 않았다. 참 좋은 학교를 위해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 있겠노라 생각했다.
매주 수요일 방과 후 학교 도서관으로 가서 30분 남짓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엄마가 책 읽어주는 수요일’을 진행하고, 독서주간에는 일주일 동안 점심시간을 활용해 전교생과 함께 ‘나만의 책 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리고 개교기념일에 ‘학교 사랑 페스티벌’에서 인형극, ‘나만의 그림책 만들기’와 한 줄 릴레이 이야기 쓰기인 ‘나도 쓰고, 너도 쓰고’를 운영했고.
회장이라는 이름에 따라오는 책임 때문에 조금 더 바지런을 떨며 묵묵히 일했다. 귀찮을 때도 있고, 뭐 하는 건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보면 회장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만의 책 만들기’를 한 뒤 도서관에서 다시 만난 아이들에게 직접 만든 책에 어떤 이야기를 채웠냐고 물었다. 한 아이가 책가방 제일 앞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나만의 책을 꺼내 아끼고 있다고 속삭였다. 직접 붙인 표지를 고이 쓰다듬는 손이 사랑스러웠다.
“너무 소중해서 뭘 쓸까 고민하느라 아직 아무것도 못 썼어요.”
“엄마한테 선물했어요.”
“소원이 생길 때마다 써둘 거예요. 벌써 하나 썼어요.”
재잘재잘 말하는 목소리가 내 안에 퐁퐁 터지며 나를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되게 했다.
인형극을 한 다음은 어땠나. 도서관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내가 꼬마였노라 이야기하니 아이들은 금세 다시 인형극 속으로 돌아갔다. 왜 도깨비는 자꾸 까먹는 건지 흉을 보고, 꼬마처럼 돈이 많으면 포켓몬 카드를 전부 사겠노라 하고, 그 인형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묻고. 함께 재잘거리며 혼탁한 어른의 마음에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이 배어들었다.
내 아이에게만 좋은 어른이 되는 것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이 더 보람됨을 ‘회장’이라는 무거운 이름이 선물로 건넸다. 아직 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은 끝나지 않았다. 12월 21일 마지막 ‘엄마가 책 읽어주는 수요일’을 진행하며 조촐한 파티를 할 계획이다. 어떤 책을 읽을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더 많이 웃을 수 있는 책을 읽어주고 싶다. 올해가 기쁨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