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제주집
올해가 아니라 지금까지 제주살이 2년 반 중 가장 기억 남는 장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서귀포자연휴양림을 꼽을 거다.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고, 모든 계절의 밤을 보내고 모든 계절의 아침을 만난 곳이다.
휴양림 입구에서 방문 확인을 하고, 여전히 차에 몸을 실은 채 좁은 숲길을 달린다. 차가 조금만 더 커도 지나갈 수 없을 것같이 꽉 차는 길. 넓은 앞 유리창으로 숲 그늘이 끊임없이 드리운다. 나뭇잎 번지듯 지나침이 아까워 속도를 줄이면 나뭇잎 모양까지도 고스란히 두 눈에 담긴다. 다 같은 초록빛이라도 초봄 다르고 초여름 달라 차이를 발견하는 묘미가 있고, 다 같은 초록빛이라도 숲 입구 다르고 깊은 숲 다르기에 나무에 닿는 햇빛의 양을 가늠하는 묘미가 있다.
지정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 가족 세 명은 각자의 키에 맞는 배낭을 멘다. 아빠는 제일 큰 배낭을, 엄마는 중간 크기 배낭을, 딸은 제일 작은 배낭이다. 하룻밤이지만 집을 지어야 했기에 배낭 세 개에 모든 짐이 다 들어가지 않아 아빠는 커다란 가방을 하나 더 들고, 엄마는 아이스박스를 하나 더 들었다. 아이는 아이답게 두 팔 씩씩하게 흔들며 걸어간다.
예약해둔 편백숲 야영장의 우리 집터에 모든 짐을 내려놓으며 콧구멍 크기를 키운다. 편백나무로 둘러싸인 숲 가운데 집을 짓는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기쁘기도 하고, 여유롭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 어깨마저 힘껏 펴게 되는데 모든 좋은 말이 이 자리에 모인다. 좋은 말 위에 집을 지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약한 텐트여도, 고작 세 명이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는 초소형 텐트여도 세상에서 제일 단단하고 포근한 집이 된다.
숲의 밤은 고요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 하나하나 부딪히는 소리가 세세하게 들리고, 상쾌한 공기와 묵직한 향기마저 소리가 되어 귓가를 잔잔하게 덮는다. 고요한 숲에 얹히는 우리의 목소리는 쓸데없는 농담이기도 하고, 철학적인 성찰이기도 하고, 희망찬 미래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안에서 마음의 저항은 절로 사라져 쉽게 꺼내고 흔쾌히 받아주며 기꺼이 위로한다.
요란한 까마귀 소리에 깨어나는 아침. 짙은 숲 내음이 나를 휘감고 명징한 공기는 나를 맑게 한다. 여기에 남편이 끓여 준 커피 향이 더해지면 지금 이곳은 천국이 된다. 게다가 휴양림 오픈 전 사람 없는 숲길을 오롯하게 누릴 때면 반복되는 감탄이라도 멈출 수가 없다.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찬란해서, 나뭇잎 사이로 조각조각 보이는 하늘이 아름다워서, 콸콸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이 청량해서, 대롱대롱 열린 열매가 귀해서, 발밑에 떨어진 나뭇잎이 처연해서 매 순간 감탄이다.
바닷가에서 캠핑한 적도 있고, 다른 자연휴양림에서 캠핑한 적도 있지만 우리 가족 최애 캠핑장은 서귀포자연휴양림이다. 나무가 바람을 막아주기에 바람 잦은 제주에서는 바다보단 휴양림이 좋고, 특히 서귀포자연휴양림은 캠핑 사이트가 편백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숲 한가운데 머무는 느낌을 제대로 누릴 수가 있다. 내게 좋은 곳은 남에게도 좋은 법. 예약이 치열하지만, 자리만 있다면 바로 떠날 수 있는 제주도민이기에 예약 오픈 날 실패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취소 자리를 노린다.
딸은 서귀포자연휴양림을‘두 번째 제주집’이라고 부른다. 딸의 말에 어울리는 장소가 되도록 더 자주 찾고 싶다. 집을 짓고 허물고 짐을 챙기고 풀고 다시 챙기는 번거로움 정도는 기꺼이 감수하게 만드는 그곳에서 더 많은 밤을 보내고 더 많은 아침을 만나고 싶다. 물론 예약부터 철수까지 두 번째 제주집의 집안일은 남편이 담당하기에 이 집이 더욱 마음에 드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