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를 부르는

데킬라

by 여유수집가

한 달 내내 불금을 보냈다. 네 번의 금요일 저녁 네 명의 남자를 만났다. 소개팅이었다. 너무 과묵해서 속이 탔고, 전혀 다른 가치관에 소주만 넘기느라 목이 탔고, 딱 내 취향이라서 볼이 탔고, 이럴 땐 괜찮고 저럴 땐 아니라서 신경이 탔다.

네 명 모두 만남은 불금 그 하루뿐이었다. 더는 소개팅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친구는 반기를 들었다.


“너 남자친구 없단 말 듣자마자 선배가 딱 떠올랐다니까. 나 한 번만 믿어봐.”


알게 된 지 고작 두 달 된 친구였다. 하지만 한 달 동안 합숙을 같이했으니 어쩌면 지금의 나를 제일 잘 아는 친구일지도 몰랐다. 오랫동안 알아 온 친구들이 해준 소개팅은 다 실패했지만, 지금의 나를 잘 아는 친구의 소개는 다르지 않을까. 다시 한번 불금에 남자를 만났다.


©scott webb 출처 Unsplash

경사가 가파른 계단이었다.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에 발목이 꺾일까 벽을 잡고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앞서 내려가던 그가 흘깃 뒤를 보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10분 전에 처음 봤는데, 괜찮다며 그의 손을 거절했다.


묵직한 철문을 밀고 내가 먼저 지나갈 수 있게 기다리는 남자, 저벅저벅 앞서 걷더니 의자를 미리 빼주는 남자, 내가 앉는 속도에 맞춰 의자를 밀어 넣어주는 남자, 미리 검색해봤다며 인기 메뉴를 알려주는 남자, 하지만 직접 먹어 본 건 아니라 입맛에 맞을지 걱정된다는 남자, 내가 메뉴를 고르는 동안 물 잔을 채워주는 남자.


보통 이상의 매너가 마음에 들기보다 선수는 아닌지 경계를 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스페인 여행 취소하고 교육 입소하신 거라 들었는데 여행 좋아하세요?”

“책 많이 읽으신다고 들었어요. 요즘은 무슨 책 읽으세요?”

“법대 나오셨다면서요. 고시 준비는 안 하셨어요?”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소개팅 주선자가 잘 어울릴 거라고 거듭 말하길래 궁금해서 이것저것 물어봤노라 했다. 점점 허리가 허물어지며 그에게로 몸이 당겨졌다. 새침하던 어조가 누그러졌다. 마음에 들지 않던 가게의 어슴푸레한 조명마저 점점 좋아졌다.


“술 좋아한다며. 술 마시러 가자. 뭐 마실래?”


어느새 짧아진 어미. 제일 즐겨 마시는 술은 소주면서 대뜸 ‘데킬라’라고 답했다. 며칠 전 대학 친구와의 통화에서 그녀가 남자친구와 요즘 데킬라 마시는 재미에 푹 빠졌다는 말이 떠올라서였다.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이번에는 그가 내민 손을 마다하지 않았다. 인도로 나서자 그가 손가락 사이를 벌렸다. 가벼이 맞잡았던 손이 깍지를 꼈다. 단단히 그러쥔 그의 손가락 아래가 저릿했다. 잡힌 것은 손인데 입이 말랐다.



©alena plotnikova 출처 Unsplash

레몬 조각을 들고 잠시 멈칫했다. 손등에 레몬즙을 짜 소금을 뿌린 뒤 핥아먹는 방법을 모르지 않았지만 ‘핥아먹다’에서 막혔다. 레몬에 소금을 찍어 살짝 물었다 놓으며 데킬라 잔을 비웠다. 입 안을 태우며 내려가는 술에 급히 레몬 조각을 빨아들였다.


입술에 달라붙은 레몬 조각을 떼어내며 옆에 앉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천천히 손등을 핥았다. 그가 핥는 것은 그의 손등인데 내가 간질거렸다. 데킬라 잔이 그의 입에 닿고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자 툭, 내 손에 매달려 있던 레몬 조각이 그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한 잔, 두 잔 그리고 바닥. 뜨거웠고 몽롱했고 아슬아슬했다.


의자에서 일어서면서부터 비틀거려 그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인도에 섰다. 머리가 핑 돌아 가로수를 짚었다. 등을 나무에 기대고 잠시 숨을 고르는데, 뜨거운 레몬향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다리가 휘청거렸고, 그가 내 허리를 붙들었다. 몸이 굳는 순간, 머리 위로 쏟아지던 열기가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였다. 손으로는 그를 밀었는데 고개는 저절로 끄덕여졌다. 다시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번화한 거리를 채우는 소음이 사라지며 거친 숨소리와 끈적한 레몬향이 섞이는 소리만 남았다. 나무에 기대어 섰던 나는 어느새 그에게 매달려 있었고, 뜨거운 멕시코 태양의 열기가 담긴 데킬라에 취해 우리의 1일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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