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정문에서 우연히 동기를 만났다. 취준생인 나는 서류 전형에 족족 떨어지고 있었고, 고시생이던 그는 연거푸 낙방하며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치려는데 피우던 담배를 끄며 그가 나를 불렀다.
"술 한잔 할래?"
"그럴까?"
웃음소리 끼어드는 소란한 술집은 싫고 조용한 술집은 비싸고 자취방으로 목적지를 정한 우리는 정문 옆 편의점으로 갔다. 자연스레 소주를 집어 드는 내게 그가 짤막한 갈색 병을 흔들어 보였다. 가장 싼 양주, '캪틴큐'였다.
"고급진 삶을 바라지만 찌질한 우리 같잖아."
숙취가 심해 안 당긴다는 내게 그가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캪틴큐'는 꼭 우리 같았다. 찌질한 인생끼리 찌질한 한풀이나 실컷 하자고 결의를 다지며 안주까지 찌질하게 골랐다. 각자 과자 한 봉지씩.
©phil cruz, 출처 Unsplash휘발유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이도 저도 되지 못해 끓어오르는 화와 좌절과 원망을 식혀야 하는데 오히려 불은 더 키워졌다. 거북한 맛, 쓰라린 목구멍, 홧홧거리는 뱃속, 흐릿한 시선, 삐걱거리는 머리. 임계점을 넘으면 말이 나오지 않음을 그 술자리에서 깨달았다. 둘 다 말없이 거듭 휘발유를 삼켰다.
내려가는 느끼함과 올라오는 역함이 섞여 열기가 몸 안에 고였다. 불붙은 속이 펑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 열기를 어쩌지 못해 깊은숨을 내쉬었다. 보이지 않는 내 속의 불길을 잠재우고 싶었다. 연거푸 숨을 내뱉자 그가 내 숨을 빨아들였다. 4년 내내 친구였다. 서로의 연애사를 모두 아는, 남녀를 지운 그저 사람 친구.
내 숨결을 그가 가져가고 나도 그의 숨결을 가져왔다. 휘발유가 불 붙인 불길이 친구 사이를 삼켜버리려는 순간, 나는 정신을 차렸다. 흐릿한 시선이 번쩍 뜨이고 느려지던 생각이 빨라졌다. 황급히 그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그에게 말했다.
"우리 더 찌질해지지는 말자. 분명 내일 후회해."
아무리 지금 우리 인생이 '캪틴큐'같다지만, 우리의 내일도 '캪틴큐'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Chris Taljaard, 출처 Unsplash그와 나는 텅 빈 '캪틴큐' 대신 맥주를 더 마셨다. 내일은 맥주처럼 시원한 인생이 되기를 바라며 술을 넘겼고, 내일도 우리 사이가 어제와 같기를 바라며 빈 맥주캔을 힘껏 찌그러뜨렸다.
섞어 마시면 다다음날 깨어난다는 '캪틴큐'의 속설이 내게도 적용됐다. 다다음날까지는 아니었지만 다음날 늦은 오후가 돼서야 머릿속에 낀 안개가 걷혔다.
그와 있었던 일이 블랙아웃되진 않았지만 블래아웃된 것처럼 연극이 가능했다. 우리가 마신 술은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 악명 높은 '캪틴큐'였기에 그도 나도 무사히 다시 친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캪틴큐 사진: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