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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상사와 통화하다

by 여유수집가

6인용 식탁에 딸과 내가 마주 앉았다. 밤 10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야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훈훈한 풍경은 아니었다. 수학 문제집을 푸는 딸과 책을 읽는 나는 냉랭했다. 딸은 수학 문제가 풀기 싫어 뾰족했고, 나는 몸을 빌빌 꼬며 느릿느릿 수학 문제를 푸는 딸이 좀 더 집중하길 바라 뾰족했다. 두 사람의 날 선 시선이 부르르 몸을 떠는 핸드폰에 모였다. 회식을 한다던 남편이었다.


푹푹 뭉개지는 발음이 혈중알코올농도를 짐작하게 했다. 뾰족한 눈초리가 이제는 남편을 향했지만 목소리만큼은 가시를 숨겼다. 나긋하게 어디인지를 물었다. 수학 문제집에서 핸드폰을 지나 내게로 시선을 옮겨온 딸 때문이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슈퍼마켓 앞이라는데 왜 안 들어오고 전화인지.


"한파주의보래. 안 추워? 어서 들어와."

"선유는?"

"선유는 왔지. 수학 숙제 하고 있어."


아니, 10시가 넘었는데 딸은 당연히 집에 있지. 팩 쏘아지려던 말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핸드폰 밖으로 새어 나온 이름에 딸이 눈을 키우며 입을 벙긋거려서였다.


"아빠 많이 취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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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라며 아빠의 실체를 고스란히 밝히고 '너네 아빠 정말 왜 이러니?' 하며 함께 험담을 늘어놓고 싶었으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음주에 민감한 딸이 아빠한테 실망하는 건 싫었으니까. 빨리 들어와, 추우니까 어서 와, 전화 그만 끊고 집으로 와, 우리가 기다리잖아. 최대한 차분하게 타일렀지만 같은 말을 거듭하는 동안 인내는 바닥났다. 방으로 들어가서 통화를 하려 엉덩이를 드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 직장 상사였다.


"다정하게 계속 통화할 상황이 아니에요. 좀 나오셔서 데리고 가셔야 할 것 같아요."


택시에서 내려 혼자 걸어오고 있는 남편이라 생각했는데 동행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취한 남편을 데려다준 직장 상사라니! 양말을 신거나 실내복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 하고 롱패딩을 걸친 채 후다닥 아파트 입구로 뛰쳐나갔다. 100M를 17초에 주파하던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야만 했다. 거칠게 숨을 쉬며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90도 인사를 했다. 택시를 부르며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상사와 난감한 나를 두고 반갑게 서로를 인사시키는 남편을 끌어당겼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어디 있는지. 남편을 과녁판으로 두고 욕을 마구 날렸다. 삐리리 묵음 처리 되어야 할 단어만 안 썼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까지만 가능했다.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제대로 기억 못 할 남편이니 내 속이라도 풀리게 1절, 2절, 3절을 넘어 그 이상 반복하고 싶었지만 집에는 음주단속 경찰보다 더 매서운 딸이 있었다. 딸이 아빠를 심판하기 전에 남편을 후다닥 방으로 밀어 넣었다.


"아빠 많이 취한 거지?"

"좀 피곤했나 봐."

"왜 나갔다 온 건데?"

"응, 아빠 상사 분하고 인사하라고."


온 다정을 끌어올려 수학 문제를 어서 풀라고 했다. 여전히 미적미적 문제를 푸는 딸에게 더는 날 선 눈초리를 보내 수 없었다. 부글부글 끓는 마음은 모두 남편을 향했다.


다음 날, 내게 술 좀 적당히 마시라는 욕과 상사께 거듭 사과하라는 당부를 한껏 먹고 출근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속도 좋지. 해장을 잘했냐는, 속은 괜찮냐는 질문부터 나갔다. 풀 죽은 목소리로 눈치를 보며 대답해야 하는 남편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우리 보고 사이좋고 다정한 부부래."


상사께서 아내가 '당장 들어와. 끊어!' 해야 하는데 엄청 다정하게 말하더라며 사이가 좋아 보여 부러웠다고 하셨단다. 나는 술 취한 남편에게도 우아하게 말하는 아내가 됐고.


"그래서 뭐라고 했어?"

"원래는 '끊어!' 그러는데 어제는 왜 그랬나 모르겠다고 했지."

"정말 선유 아니었으면 버럭 소리 질렀지. 다 딸 덕분이네. 선유 앞에서 전화받았던 게 천만다행이었어."


지금껏 나를 민 작가님이라고 부르던 남편 부서원들이 내게 새로운 별명을 붙여 줬다. '민사임당'이라고. 딸 덕분에 날 것을 감추고 우아함을 두른 채 신사임당 근처에 가보게 됐다. 자식이 부모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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