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의성 산불, 여전히 무섭고 무력하다

by 여유수집가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이 경북 북부지방을 시커멓게 태우고 더 옆으로 더 밑으로 내려가고 있다. '태웠다'로 마무리하고 싶지만 아직도 불길은 멈추지 않았다. 뉴스에서 보여주는 현장은 나를 1993년 포항으로 데려다 놨다.


1993년 4월 18일 일요일 아침. 하얗게 보여야 할 아파트 벽이 노랗게 보였다. 아침인데 해 질 녘 같고 그렇다고 노을빛과는 다른 노란빛이 이상해 베란다에 앉아 성당 가신 엄마가 오시기를 기다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는 매번 부르던 나와 동생의 이름이 아닌 '불났어! 산불!'을 외쳤다. 사실 이때만 해도 산불의 무서움은 열세 살의 내게 와닿지 않았다.


오후 4시 30분. 아파트 맞은편 산꼭대기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산 위를 넘실거리며 솟아오르는 불도 무서웠지만 나무 뒤에서 시뻘겋게 몰려와 순식간에 나무를 짚어 삼키는 불이 너무 끔찍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건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 그 짧은 시간에도 불길은 허겁지겁 산을 삼켰다. 빠르게 달려옴과 동시에 이리저리 튀어 다니는 불길은 뒷산을 태우며 아파트까지 위협했다.


집집이 양동이에 물을 받아 아파트 잔디밭에 뿌렸다. 저지선 구축이었다. 양동이를 나르는 건 중학생부터 할 수 있었는데 대피해야 할 상황을 대비해서였다. 달리기가 느린 어린이들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지만 멀리라고 해도 아파트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때 나와 동생 그리고 동네 아이들이 할 수 있었던 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제발'을 말하며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탄 냄새와 열기에 숨쉬기가 어렵고 온몸이 뜨거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용광로 안이 이러지 싶었다. 까맣던 하늘에 나타난 헬리콥터마저 불길에 잡아먹힐까 두려웠던 기억도 난다. 오죽하면 20채가 넘는 집이 불에 탔다는 뉴스 멘트도 귓가에 남아 있다. 지금 찾아보니 26채였다.


KakaoTalk_20250326_121732431.jpg

무섭고 무력했던 어린 날의 기억은 아직도 찍어 놓은 동영상을 보듯 생생하게 재생된다. 혹시나 시간을 지나오며 내 기억이 참담함을 부풀린 것은 아닐까 그 시절 일기를 꺼냈다. 열세 살의 나도 마흔이 넘은 지금의 나도 끔찍한 불 앞에서 여전히 무섭고 무력하다. 그저 하늘에 애타게 바랄 뿐이다. 바람을 잠재우고 폭우를 내려달라고. 1993년 포항의 한 아파트 마당에서 말했던 것처럼 오늘도 '제발'을 말한다. 그때는 동생과 함께였다면 2025년에는 딸과 함께 기도한다. 이제 더는 희생 없이 제발 모두 무사하기를, 제발 어서 불길이 멈추기를.


1993년에는 양동이를 옮기지 못했지만 2025년에는 산불 피해 긴급 모금에 마음을 보탰다. 그래도 무력한 마음은 나아지지를 않는다. 편안한 집에 머무르는 내가 미안한 하루가 또 지나간다.


아침부터 아파트가 노랗게 보이는 등 무척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엄마께서도 성당에 다녀오시는데 수도산 쪽에서 연기가 펄펄 나고 하늘도 시커멓다고 하셨다. 오후 4시 30분경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베란다로 나가보았더니 우리 동 포고 쪽 옆으로 정류소 맞은편 산에서 아주 큰 불이 나 있었다. 산꼭대기에서 시뻘건 불길이 바람이 이리로 불면 이리로 저리로 불면 저리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무서웠고 산 숲 속에서 보이는 시뻘건 불길이 너무도 끔찍하게 보였다. 우리 아파트와 조금의 간격으로 떨어진 뒷산에도 불길이 옮겨와 전기 사용 중지로 단전을 하고 가스 밸브를 잠그고 물을 받아 놓는 등 대비를 하였다. 그리고 양동이에 물을 받아 뒷산과 연결된 아파트 잔디밭에 물을 뿌렸다. 잔디밭에 불이 붙으면 아파트가 불에 타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언니 오빠들과 아주머니들은 양동이에 물을 받아다가 아저씨들에게 가져다 드리면 아저씨들은 그 물을 잔디밭에 뿌리셨다.... (중략)...
불의 힘은 놀랍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아무리 두뇌가 발달한 인간이어도 불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니 인간의 능력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하루 종일 아니 어제부터 수고하신 소방관 아저씨 고맙습니다.'

- 초등학교 6학년 시절 포항 산불을 겪으며 내가 쓴 일기 중



※ 제목 사진 출처: 연합뉴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