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총알 자국과 슈톨퍼슈타인
지난 여행들에서 마이리얼트립의 가이드 투어가 항상 좋은 기억을 남겨주었기에 이번에는 마이리얼트립의 프라이빗 투어를 여행의 첫 날 일정에 맞추었다. 첫 날을 가이드와 함께 돌아보고 나면 대중교통 관련 팁을 얻는다던지, 앞으로의 여행에 참고할 수 있는 알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이번에 베를린에서 신청했던 투어는 '베를린의 설민석이다' 라는 리뷰가 가득한 투어라서 기대가 컸다. 큰 맘먹고 3인용 비용을 한 번에 지불해 완전한 프라이빗 투어를 예약했다(지금 이 시점에 리뷰를 쓰면서 문득 가이드님의 건강이 걱정된다. 부디 무사히 잘 지내고 계시길)
가이드님이 주셨던 책자나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을 모두 다 담지는 못하겠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몇 가지들, 그 이야기들을 기반으로 혼자 여행 다니면서 잊을 수 없었던 것들 위주로 기억을 더듬어나가며 이야기를 더해보려 한다.
베를린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총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냉전 속에 지내야하는 도시였다. 다만 베를린이 동독/서독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만 알고 국경 지대에 베를린이 위치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사실 베를린은 지리적으로 완벽하게 동독 안에 고립된 공간이었다. 동독 안에서 서독과 동독이 나뉜 공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극심한 대치와 긴장이 도사리는 도시였다고 한다. 특히 독일 그 자체로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나라들이 참여한 전쟁의 중심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서 전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그 전쟁과 상처의 흔적이라는 것이, 기념관이나 박물관과 같은 형태로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도시의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상처를 억지로 지우거나, 반대로 억지로 부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길과 건물에 남아있을 뿐이다.
이 상처의 흔적이 독일의 피해, 그러니까 독일이 다른 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아파했던 기억만 담고 있는 건 아니다. 독일이 수많은 다른 나라들에게 스스로 행했던 악독한 기억의 흔적도 품고 있다. 우리는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가해자로서의 과오를 더 크게 생각하는 진심이 느껴진다. 이 모든 흔적과 기억들이 어우러져 도시 전반적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잊지 않는 현재'를 만들어낸다.
세 장의 사진은 첫 방문지였던 독일 국회의사당의 정문 기둥을 찍은 모습이다. 기둥 곳곳에 다른 색의 벽돌로 네모나게 땜빵이 나있는데, 이렇게 색깔이 다른 벽돌들은 모두 침공 전투 당시에 총탄의 흔적이라고 한다. 특히 국회의사당은 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의 침공으로 인해 화재와 공격이 심각했는데 당시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들도 모두 이 국회의사당의 기둥이나 천장 등에서 찍혔다. (오른쪽 아래 흑백사진)
브란덴부르크 문이나 박물관 등 다양한 곳에서 보이는 '땜빵'의 자국도 놀랍지만, 특히 이 국회의사당이라는 공간에 남아있는 전쟁의 흔적은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사진은 기둥의 일부분만을 담아내고 있지만 실제로 가서 보면 건물 전체가 얼룩덜룩하게 다른 색의 벽돌로 보수되어있다.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심지어 국회의사당의 내부에는 당시 소련 군인들이 들어와서 기둥 벽에 해둔 낙서까지 유리벽 안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또, 국회의사당은 일반인들도 관광할 수 있도록 개방을 해두는데, 관광객이나 국민들이 바로 국회의사당 천장 위로 올라가서 본회의장을 아래로 바라볼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두었다. 실제로 회의가 있는 날에 국회의사당을 발견하면 메르켈 총리가 출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발아래에서 본회의가 개최되는 모습을 내려다볼 수도 있다. 국회의원들이 회의를 하는 모습 역시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온전히 다 지켜볼 수 있다. 국민들이 정부의 그 누구보다도 가장 위에 있고, 언제나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공간을 설계했다고 한다.
국회의사당은 말 그대로 '국회'가 개최되고 국가의 중대사가 논의되는 공간으로서, 모든 나라에서 으뜸가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인들이 침공받았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상처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접하며 하루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베를린의 또 다른 대표적인 관광지, 브란덴부르크 문(왼쪽)과 카이저빌헬름교회(오른쪽)의 기둥들도 마찬가지다. 브란덴부르크문은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이며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아픔의 공간이면서도 이후 통일의 순간을 바라보는 환희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역시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역사적인 공간이나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총탄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오른쪽 사진의 카이저빌헬름교회 역시 베를린의 유명한 랜드마크나 다름이 없는데, 2차 세계대전 중 공습으로 회복이 불가능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처참했던 현장을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복원이 되고 있다.
길거리 곳곳에서 총탄의 흔적만큼이나 자주 만나볼 수 있는 것은 슈톨퍼슈타인이다. 익숙하지 않은 독일어였지만 이 단어만은 꼭 기억하고 싶어 숙소로 돌아오고 나서도 여러 번 적어두었고, 베를린에서 돌아다니는 열흘 내내 길에서 발견할 때마다 숙연한 마음이 들곤 했다.
이게 바로 슈톨퍼슈타인이다. 슈톨퍼슈타인은 Stolpern(걸려서 비틀비틀 넘어지다)과 Stein(돌)의 합성어로, 나치에 의해 수용소에 끌려가서 참담하게 희생당해야만 했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한 예술가가 본인의 사비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바닥의 이 동상들이 마치 발걸음을 잡아끌듯, 비틀비틀 걸려 넘어지듯,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기리는 마음을 갖자고 지속적으로 외치는 걸 느낄 수 있다.
동상의 내용은 간단하다. 동상이 박혀있는 곳은 처형되었던 유대인이 살던 곳이다. 희생자의 이름과 생년월일, 직업, 어느 곳(수용소)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등의 정보가 간략하게 적혀있다. 1992년부터 군터 뎀니히라는 조각가가 이 작품을 길거리 곳곳에 새겨 넣기 시작했으며, 현재 베를린 거리에서 에만 5,000여 개의 슈톨퍼슈타인을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슈톨퍼슈타인은 독일 전국 각지로 퍼졌고 현재 유럽 곳곳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그 당시의 나치는 꼭 유대인들만 대상으로 만행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다른 독재국가들에서도 보이는 모습처럼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들, 집시, 사회적 약자들을 무자비로 잡아들이고 학살했다(평양에도 장애인들이 돌아다니지 않는다) 이 슈톨퍼슈타인은 그 당시 희생되었던 사람들을 모두 기린다.
2019년 12월 30일, 슈톨퍼슈타인이 바이에른주 소도시 메밍겐의 한 거리에서 75,000개째 제작되었다는 기사를 보면 여전히 이 작업은 현재 진행 중이다. 처음에는 아티스트 개인이 각 사유지의 소유주들과 조율을 해나가며 작업을 시작했으나(사유지 길 한가운데에 동상을 박아 넣는 거니까) 갈수록 개인과 단체들의 후원이 이어졌고, 어느 순간부터 베를린시에서 이 작업을 공식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 유명한 장소들이 되어버린 홀로코스트 추모공원을 포함해서 베를린 곳곳에 이 당시를 추모하고 본인들의 과오를 뉘우치는 공간이 몇 백개가 족히 된다.
이 슈톨퍼슈타인이 얼마나 자주 있냐면, 처음에는 돌아다니면서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어두려고 했는데 여행 사흘 만에 포기했다. 정말 어딜 가나 있었다.
'HIER WOHNTE: 이 사람이 여기 살았다.'
그리고 신상정보.
어떤 슈톨퍼슈타인은 아이의 신상정보를 담고 있었다. 태어난 지 3년 만에 수용소에서 죽어버린 아이의 슈톨퍼슈타인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나라의 후손들이, 전 세계가 기억하는 조상들의 악행을 곱씹는 방법은 가끔 기괴할 정도로 자학적이라고 느껴졌다. 자신들의 아픈 상처를 남기는 법도 그랬다. 그 모습에 감탄하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고, 우리의 상황을 대입해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 개인의 삶에서, 그리고 어떤 공동체에 속한 일원으로서의 내 삶에 대해 깊게, 진심으로 반성하는 자세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