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인 판단은 남의 일이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몸이 허약했다.
오래 달리기는 잘해도 단거리 달리기는 아주 못했는데 어른들은 항상 순간적으로 힘을 써야 하는데 그걸 못해서 그렇다며 말하셨다. 그 말이 맞는 건지 힘을 써야 하는 운동 종목은 전부 못하는 편이었는데 피구를 해도 피하는 건 잘하지만 힘 있게 던지질 못해서 위협적인 선수가 되지 못했고, 팔씨름, 철봉 매달리기 이런 내기는 항상 가장 못하는 사람이었고 대신 등산, 오래 달리기 같은 끈질기게 오래 하는 종목은 그나마 잘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나는 힘이 없는 사람이다.
얼마 전 꾸준히 추적 검사하던 난소 종양이 아무래도 사라지지 않는 종양 같다는 의사 소견을 들었다. 없어지지 않는 종양이니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고 수술 날짜를 잡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순간 드는 생각은 깊은 우울감에 "내 몸이 또" 이런 생각뿐이었다.
한 5년 전에도 기형종 제거술을 받았었던지라 수술 후에 내 몸이 어땠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당시에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 선생님도 이건 힘들지 않은 수술이고 퇴원도 일주일 내에 가능하다 했고, 나도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상 회복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술 전에 꾸준히 운동을 해서 한껏 체력이 올라와있었는데도 예전처럼 숨을 쉬는 게 편하지도 않았고 퇴원을 하고 출근을 해서도 앉아서 일을 하고 있으면 아랫배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들었다. 거기에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은 느낌까지 더해지면 더 이상 일에 집중하고 싶어도 그만 멈춰야 했다. 금방 지치고 숨이 가빠지다 보니 좋아하던 배드민턴은 같이 하던 멤버들에게 폐를 끼치는 듯해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고 뭔지 모를 피로감에 등산도 예전처럼 잘할 수 없었다. 내 몸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그렇게 무력하고 우울할 수 없었다. 파이팅 넘치게 개발을 하고 프로젝트에서 그럴듯한 성과를 내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멈춰야 할 때, 속상함에 울기도 했고 같이 하는 팀원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의사 선생님은 위험한 수술이 아니고 오래 걸리지 않는 수술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의사 선생님 기준에 회복이 빠른 수술, 아닌 수술의 기준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나는 내가 빠질 우울감이 벌써 걱정인데. 몸 안에 종양이 있다는 걱정보다 수술을 하느라 내야 하는 병가로 우리 팀의 누군가는 나의 일을 또 해줘야 한다는 미안함, 하반기에는 그럴듯한 성과를 내고 싶었던 내 욕심, 이제 슬슬 임신을 준비하고 싶었던 내 가족계획. 모든 게 머릿속에 엉키는 느낌이라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다고 하면 몸이 우선이니 당장 몸을 먼저 챙겨라 라고 말할 텐데, 막상 내 문제가 되면 이성적인 판단이 들지 않는다.
1.7cm.
위험하다고 판단할만한 크기가 아니다. 혹은 보통 5cm를 넘어야 터질 수 있어 제거해야 한다던데 이 정도 크기면 그대로 달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 안 커졌다면 더 이상 안 커지고 가지고 살아도 되는 거 아닐까. 근데 혹시나 내가 임신을 했을 때 이 혹이 눌려서 터지면 어쩌지.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휴가를 언제 내야 주변에 폐를 덜 끼치지. 명절 전 주에 수술을 하면 업무 복귀까지는 늦출 수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이번이 결혼하고 첫 명절인데 며느리가 인사를 안 가도 괜찮은 걸까. 그럼 다른 시기에 수술을 하고 휴가를 길게 내야 하나. 어차피 재택이니 병가를 길게 쓰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정말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생각이 왔다 갔다, 수술 날짜에도 생각이 왔다 갔다. 주변의 의견에도 생각이 왔다 갔다.
건강만큼 내 마음대로 컨트롤되지 않는 게 없다.
공부는 하면 됐다, 못하는 건 열심히 하면 되는 거였다. 못 하던 요리도 꾸준히 하다 보니 잘한다.
하기 싫은 것도 그냥 꾸준히만 하면 되는데, 건강은 안 된다.
기형종이 왜 생기나요 라는 질문에 원인은 모르고 여드름 같은 거라고 한다. 무슨 여드름 짜려고 전신마취를 하고 배에 칼을 대나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건강은 너무 야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