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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큰철 Feb 03. 2023

풀베기... 시작입니다.

<안나 카레니나>

앳된 남자 모델이 들어왔다. 스무 살 초반이나 됐을까, 1990년대 후반 또는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흔히 말하는 찐 MZ세대인 것이다. 가운을 벗고 누드 크로키의 모델로서, 단상에서  그가 처음으로 틀은 음악은 퀸(Queen)의 <Under Pressure>였다.


'캬- 이 친구 음악 좀 아네... 그런데 요즘 잘 나가는 쟁쟁한 친구들 말고 왜 퀸이지?'

나도 퀸 세대는 아니다. 퀸은 즐겨 듣는 라디오의 신청곡 단골손님이었고, 듣다 보니 너무 좋아서 찾아 듣게 됐다. 여친과 헤어지고 세상이 무너진 듯 <Too much love will kill you>를 귀에 달고 산적도 있다. 퀸은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몇 년 전에 그들의 이야기가 영화로도 나왔으니 이 친구도 어찌어찌 퀸의 음악에 치여버렸을 거라 짐작했다. 이것이 고전의 위엄인가. 콘텐츠가 쏟아지는 시대에서도, 고전은 정말 끈덕지게 살아남아서 천년만년을 향유한다. 10년 뒤 봄에도 <벚꽃엔딩>은 울릴 테고 100년 뒤 크리스마스에도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를 듣겠지만 그 옆엔 퀸도, 비틀즈도, 베토벤도 여전히 거드름을 피우며 있을 것이다. 온갖 강자들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무협물에서 노인은 약자가 아니라 어린 도전자들을 짓밟으면서 살아남은 초절정 고수들이다. 나는 그들을 고전이라고 부르겠다. 


그래서 올해는 고전 읽기에 도전하려고 한다. 수백억의 자본과 인력이 집약된 요즘 콘텐츠에 비해 고전은 고리타분하고 보잘것없어 보여 무시해 왔다. 셰익스피어도 유튜브 시대에서 베스트셀러를 낼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첫 책은 <안나 카레니나>다. 첫 문장이 워낙 유명해서 골랐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문장은 <총, 균, 쇠>에도 인용이 됐다. 3권에 1500쪽이 넘는 무식한 분량이라 한 달간 고생했지만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등장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일일이 기술하는데 놀랐고, 농경생활부터 귀족들의 사교생활까지 아우르는 디테일에 감탄했다. 톨스토이는 신인가? 이걸 다 취재했다고? 이게 전지적 작가시점이지...!! 그는 혼자 인터넷을 했던 미래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중에 만났던 반가운 등장인물이 있다. 레빈 콘스탄틴. 나약하고 자존심 세며 쉽게 의심하고 좌절하지만 현실적이고 책임감 있기에 다시 일어서고, 삶의 의미를 되물으며 성장하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여기 그가 지주로 있는 시골 영지의 바쁜 상황이, 언뜻 보면 무척 낭만적일 수도 있는 긴 글로 묘사되어 있다.


    일 년 중 여름, 고비였다. 올해 수확이 벌써 결정되고 이듬해 파종할 준비를 시작하며 풀베기를 해야 할 때, 밀이 다 익지는 않았지만 전부 이삭이 패서 회녹색으로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때, 초록색 귀리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누런 덤불과 함께 늦게 파종한 곡식들과 어울려 울퉁불퉁 자라나는 때, 이른 메밀이 벌써 틔워 땅을 덮은 때, 가축들이 짓밟아 돌처럼 딱딱해진 땅도 쟁기가 들어가지 않는 곳을 제외하고는 반쯤 갈린 때였다. 밖으로 내놓은 말린 거름더미는 해 질 녘이면 향긋한 풀냄새와 섞였고 저 아래로는 뽑혀서 거무스름 해지는 수염풀 줄기 더미와 더불어 잘 가꾸어진 초원이 낫을 기다리며 가엾은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키티에게 고백을 거절당해 마음의 상처를 입고 돌아온 레빈은 눈앞에 닥친 일거리들 때문에 상심할 시간도 없다. 책도 써야 하고 타성에 젖은 집사들과 게으른 농부들도 다그쳐서 영지를 제대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일거리들을 공을 들여 구구절절하게 묘사한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긴 묘사를 통해 지나가던 여행객과 책을 읽는 독자들, 하물며 이야기 속 농부들 까지도 잠시 감상에 젖을만한 풍경이 되었지만 한 줄 한 줄의 묘사가 레빈에게는 해치워야 하는 일거리가 된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 물씬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도시에서 휴가를 온 친형은 영지 경영에 훈수나 두고 낚시를 가자고 보챈다. 이따금씩 들리는 키티의 소식, 피어올랐다가 사그라지기를 반복하는 희망, 자존심과 열등감으로 레빈의 감정의 기복도 심해진다. 복잡한 문제들로 고통받던 레빈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단순한 일을 하면서 해방되는데 농부들과 함께 들판의 풀을 베어내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다. 우리가 고되게 몸을 쓰며 일하다 보면 세상일을 잊고 무아지경에 빠지는 환희를 경험하고는 한다. 심각한 문제들은 시간과 마음을 써가며 고민해도 잘 풀리지 않는 반면, 몸을 써서 바로바로 해결되는 문제들은 결과도 눈에 잘 보여서 보람과 여유도 생긴다. 농부들과 합심하여 오늘 내 다 끝내지 못할 것 같았던 들판의 풀을 전부 베어냈을 때, 레빈은 자신의 성장을 체감하며 기쁨을 느꼈다.


지난 2년간 나는 나오지 않는 스토리를 짜내려 허송세월을 보냈다. 시간과 에너지는 쏟았지만 결과는 나오지 않아 허탈하고 우울했다. 올해는 소소한 시도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많이 내려고 한다. 많이 배우고, 겪고, 그리면 자연스레 본질적인 문제에서도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글쓰기도 그 시도 중 하나이다. 즐거운 풀베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끝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텅 빈 들판을 보며 나도 뿌듯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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