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노섭, <노예 12년>
"부모님 안 계시니? 너 엄마 없어?"
2009년 개봉된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 김혜자는 진범인 아들 원빈 대신 잡힌 청년을 보고 묻는다. 이 청년은 원빈과 똑같이 정신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다. 다른 것은 원빈은 자신의 혐의를 벗기려 사방팔방 뛰어다닐 엄마가 있었고, 이 청년은 없었다.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다면 억울하게 누명을 쓸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다가 닥친 위기에서 기댈 최후의 보루가 가족이 될 때가 있다. 군대나 회사에서 부조리한 일을 당했을 때, 바다에서 배가 침몰했을 때, 해외에서 실종당하거나 구금되었을 때, 핼러윈 거리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등등 법과 나라가 가족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한 순간 혈육을 위해 두 팔 걷고 나서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봤다.
나는 살면서 크게 억울한 일을 겪진 않았지만, 가족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면서 컸다. 나름 평탄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부모님의 덕이 크다고 생각한다. 지금 따로 나와 살고 있지만 독립했다는 말이 무색하다. 가끔 금전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을 받기도 하거니와 한 달에 몇 번씩 본가에 가서 집밥도 먹고 반찬도 얻어먹는다. 온 가족이 모여서 하는 식사는 내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준다. 가족이 있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나이를 먹은 지금에선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험난한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건 쉽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제 나는 가족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곤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받은 것이 쌓이고 채무감과 불안감도 쌓인다. 지금은 동생네 가족이 부모님 근처에 살면서 나 대신 자식노릇을 하고, 갓 태어난 조카가 즐거움을 드리고 있지만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모두가 손을 뻗어 행복을 떠받치고 있는데 내 손만 닿지 않아 무안하다. 요새 카드 캐시백이 5% 정도 하던가? 5% 정도만이라도 내가 받은 걸 돌려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도 편안함과 즐거움을 주는 가족이 되고 싶다.
한차례 감격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자 우리는 아늑한 불가에 옹기종기 모여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떨어져 지내던 동안 느꼈던 희망과 두려움, 각자가 겪은 고난 과 역경을 남김없이 다 털어놓았다. 알론조는 서부 지역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에 이제 곧 아버지를 살 수 있는 돈이 다 모일 거라는 편지를 보내왔다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알론조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희망이 아버지를 풀려나게 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271p
<노예 12년>의 작가 솔로몬 노섭이 노예생활을 탈출하는 데는 본인의 뛰어난 기지와 주변의 도움, 그리고 운도 따라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1등 공신은 가족일 것이다. 언제 끝날지, 여기서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극한 상황에서 솔로몬은 가족을 다시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12년을 버텼다. 그 반대편에서 솔로몬의 가족들은 그를 빼내오기 위해 서로를 다독이며 각자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가족품으로 돌아온 솔로몬에게 남은 소원은 소박한 삶이나마 당당하고 꿋꿋하게 누리다가 아버지가 잠든 교회 안마당에 같이 묻히는 것이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죽어도 가족과 떨어지기 싫다는 거 하나만은 잘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