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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won Aug 03. 2015

잘못된 삶

열망으로서의 인권  ①

“나를 태어나게 한 손해를 배상하시오”


90년대 중반, 한 여성이 산부인과 의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여성은 아이를 임신하고 양수검사를 받았다. 산부인과 의사는 아이가 건강하다고 말해주었다. 여성은 기뻤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는 어딘가 이상한점이 있었다. 진단결과 다운증후군이 확인되었다.


다운증후군은 21번 염색체 이상으로 발생하며, 다운증후군이 없는 사람에 비해 평균수명은 짧고 지능지수도 낮다. 다운증후군에 의한 얼굴표정과 생김새는 우리 사회에서 대체로 아름답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여성의 실망감은 너무 컸고, 아이를 잘 키울 자신도 없었다. 산부인과 의사에게 책임을 묻고 싶었다. 이 여성은 원고가 되어, 다운증후군 아이를 제대로 진단하지 못한 의사의 실수 때문에 자신이 장애아를 출산해 겪는 정신적 충격과 양육비 상당액을 손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 소송에는 또 다른 원고가 있었다. 바로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 자신이었다. 아이의 법적인 대리인으로서 어머니가, 즉 아이를 출산한 그 여성이 아이의 이름으로도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아이가 태어난 것으로 인해 아이 자신이 입은 손 도대체 무엇인가? 아이가 스스로 원고가 되어 제기한 소송의 청구 내용은, 말하자면 "당신의 실수로 내가 태어났으니 손해를 배상하시오"라는 주장인 셈이었다.  




가급적 태어나지 말아야할 인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장애를 입은 아이는 가급적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살아있는 장애아를 유기하거나 학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은 “이왕 태어났기 때문”에 사회가 그를 보호해야한다는 관념에 불과하다. 장애라는 조건은 그 자체로 되도록이면 세상에 나타나지 않으면 좋을 것이므로, 최대한 장애아의 출생은 지양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위의 소송을 판단해야 하는 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다. ‘가급적 태어나지 말아야할’ 장애아가 출산하는 일이 발생했고, 그 부모는  충격을 받았으며, 산부인과 의사가 제대로 진단하지 못한 실수를 한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의사는 손해배상을 해야한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다(물론 이 사건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다운증후군을 이유로한 낙태는 허용되지 않는 우리나라 모자보건법 규정을 고려해야한다. 하지만 이 조건은 일단 논의에서 제외하도록 하자).

  

나는 이 소송에 대한 이야기를 로스쿨에서 열린 민법수업시간에서 처음 접했다. 교수는 인간의 생명이 과연 손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법원의 고뇌를 설명했다. 그 강의실 한 가운데서 나는 휠체어를 타고 앉아있었다. 나는 질병으로 인해 장애를 가지고 있다. 내 질병도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출생 전에 미리 진단이 가능하다. 나는 내가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 부모가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어떤 질병을 가진 장애아가 출생하는 일을 불행한 ‘손해’로 여기는 입장은, 같은 질병을 가진 장애인들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장애인인권운동가들 중 일부는 이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장애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모욕적인 일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내가 가진 질병은 ‘골형성부전증’이라는 희귀한 이름의 병이다. 그런데 어떤 여성의 태내에 있는 생명체가, 나와는 혈연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골형성부전증을 가졌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같은 병을 가진 아이를 낙태하는 일이 허용되거나, 낙태를 하지 못하고 출생한 경우 그 부모가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면 나는 그와 같은 상황이 나의 존재를 모욕한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와 그 아이의 공통점이라고는 오로지 '골형성부전증' 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모욕을 느끼는가?


정체성으로서의 질병


내가 만약 심각한 도벽이 있거나, 담배를 지나치게 많이 피우거나, 새를 너무나 무서워하는 성향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도벽이 있거나 담배를 많이 피우거나 새를 극도로 무서워하는 아이의 출생을 애초에 금지하더라도, 내가 나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모욕감을 느낄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흡연성향이나 새에 대한 공포 등 그 성향이 무엇이든 간에, 출생 전에 의도적으로 어떤 성질을 제거하기 위한 유전자 조작이나 낙태 자체에  대해 비윤리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나의 존재가 부정당한다는 의식과는 다른 문제다.


골형성부전증과 같은 질병과 그로인한 장애는 도벽이나 담배, 새에 대한 공포와 같지 않다. 나는 이 질병이 나의 ‘정체성’의 일부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고 믿는다. 이 질병은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의 신체에 제한을 가한다. 하지만 이 질병으로 인해, 나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표하는 친구를 만날 수 있으며, 세상이 깊이 감추고 있는 질병과 노화라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신체적 매력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고, 우리나라 사회복지제도와 지하철역 휠체어 리프트에서 나오는 음악을 알게 된다. 이런 요소들은 나라는 인간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무엇에 분노해야하는지를 결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 인간을 인권의 원칙에 따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일은, 그 사람을 학대하지 않고 선량하게 배려하는 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선량하게 배려하는 사회는, 장애를 가진 아이의 출산을 막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그 아이가 인격을 가지고 태어나 장애로 인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지 않도록, 사전에 장애아의 출생을 최대한 예방하는 것이 선량한 배려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인간이 가진 고유한 특질(장애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가치가 낮다고 여겨지는 모든 특질들)조차도 그 사람의 일부로 수용하고 존중하는 사회는, 장애에 대한 예방정책을 펼칠 때에도 그것이 이 땅을 현재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삶을 모욕하지는 않는지 섬세한 감수성과 지성으로 논쟁을 다. 이런 사회는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가진 그 어떤 누추해보이는 조건들이라도 함부로 그 가치를 판단하지 않은 채, 신중하게 타인의 고유한 삶의 조건을 존한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살아가고 있을까. 참고로 위와 같은 소송을 법학에서는 ‘잘못된 삶(wrongful life) 소송’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들은 의문을 품는다. 무엇이 '잘못된 삶'이란 말인가. 질병이나 장애를 낭만적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열망, 즉 자신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특질들을, 그것이 비록 우리 삶을 제약할 수 있는 질병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 삶의 일부로 통합하고 하나의 인격적 요소로 품어내기를 바라는 강력한 열망은, 우리에게 '잘못된 삶'이 무엇인지를 되물을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 그렇다면 우리 법원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더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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