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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 Mar 22. 2022

3. 나를 만든 친구

근데 넌 왜 우냐.


저녁 8시가 넘어서 수진이한테 전화가 왔다. 드문 일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고, 친하다는 말로 부족한 가까운 사이지만 아무 일 없이 전화로 안부를 묻는 일은 잘 없다. 별일이 없을 때는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게 살다가, 마음 한구석에 아주 작더라도 구멍이 났을 때, 그 구멍을 혼자서 어찌하지 못할 때 주로 내가 전화를 한다.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다. 최근 수진이 아빠가 마음이 많이 안 좋으셨던 터라 아빠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너는 어때?"라고 묻자 "나도 힘들어. 하영아"라고 말하며 수진이가 울었다. 수진이가 '나도..'까지 말했을 때, 나도 이미 눈물이 났다. 말이 끝났을 땐 내가 더 크게 울고 있었다. 수진이는 "근데 넌 왜 우냐. 기가 막혀서 눈물이 쏙 들어가네"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나는 또 따라서 웃었다. 나 때문에 수진이는 길게 울지도 못했다. 무슨 말이든 해줘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 말이나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전화를 받기 전에 나는 여느 때처럼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기분 좋은 댓글을 읽고 조금 들떠있었고, 댓글의 답장을 고민하고 있었다. 내 상태에 슬픔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거짓말같이 수진이를 따라서 곧장 눈물이 났다. 수진이의 무거운 마음이 고스란히 옮겨졌다. 우는 것 밖에 못하는 게 속이 상했다.



집 근처에 파파이스가 처음 생겼을 때, 중학생인 우리는 핑거휠레 한 조각을 시켜서 둘이 나눠 먹었다. 내 소원은 핑거휠레를 열개쯤 시켜놓고 원 없이 먹어보는 거였다. 어느 날 파파이스에 나를 불러낸 수진이가 쟁반에 수북하게 쌓인 핑거휠레를 들고 테이블로 왔을 때, 나는 진지하게 '아...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하고 생각했다.


아파트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남동생과 나를 차별하는 할머니에 대한 분노를 일러 받칠 때마다 수진이는 속상해하는 내 감정을 빠짐없이 받아 준 후, 할머니를 같이 비난하는 대신 할머니를 대변했다. 덕분에 미움이나 상처를 키우는 대신 누군가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수진이는 공부도 잘했다. 반에서 꼴찌쯤 되면서도  편한 나를 유일하게 포기하지 않은  수진이밖에 없었다. 나를 독서실이나 단과학원 같은 곳에 끌고 다니고, 그걸로도 모자라 시험 보기 전에 이거라도 외우라며 요약노트를 내밀었다. 나는 수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조금 공부하는 척을 하다가 몰래 만화책을 봤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를 봤다. 수진이는 그런 나를 어르고 달래고 협박해서 결국 중간 이상은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극성을 부린  선생님이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무시한다는 이유였고, 내가 무시당하는  참을  없어서였다.


수진이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어떤 것들을 가르쳐 줬는지는 밤을 새워도 다 쓰지 못한다. 스스로 사랑할 만한 구석이 아무것도 없던 나를, 스스로를 긍정하고 누군가를 아낌없이 사랑할 수도 있는 사람이 되게 한건, 전부 수진이가 한 거다. 나에게 엄마 대신, 엄마보다 큰 마음으로 수진이가 와주었다. 세상을 살면서 도저히 나를 믿을 수 없는 순간에도 나를 믿어 주는 수진이를 믿기 때문에 괜찮았다.



너의 무거움이, 누군가에게 이 정도의 의미가 된 삶이라면 조금은 위로가 될까. 편안한 잠을 자고 있길. 계속해서 위로를 보내주고 싶은 밤이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을 때, 처음 카메라를 사준것도 수진이었다. (사진속의 카메라는 아니고, 이 사진을 찍은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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