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독립이란 것을 한건 대학교 1학년 1학기가 막 시작되어서였다.
대학교 입학 전 남는 3-4개월의 시간 동안 고모부의 회사에서 알바를 해 매달 5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고, 월급은 받는 족족 전부 사용한 것 같다. 학교에 들어가서 얼굴을 익히고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생길 즈음 학과 동아리에 관심이 갔고, 사진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없어서 사진과 가장 비슷한 영상동아리에 들어갔다. 처음 들어선 동아리방은 지저분한 남자 선배의 큰 자취방 같은 분위기랄까. 어디서든 주워왔을 갖가지 조악한 책상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책상 위엔 대가리가 큰 애플컴퓨터가 두대, 비디오카메라와 필름 및 장비들이 늘어져있었다. 나름 영화 상영 방이라고 가벽으로 막아놓은 공간엔 소파와 큰 티브이가 있었고, 소파엔 이불 비슷한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동아리 회장이란 대선배는 "난 여자는 좋아하는데, 여자랑 작업하는 건 질색이야."라며 도발했고, 그 도발에 넘어간 나 포함 4명의 여자를 제외한 모든 지원자는 더 이상 동아리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동아리엔 거의 대부분 나이 많은 남자 선배들과 우리 기수 4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회장한테 그런 말을 듣고도 기어이 나온 우리들은 전부 약간 돌아이였다. 한 명은 대구에서 올라온 동갑내기 글래머로, 화끈하고 쿨하고 야하고 열정적이었다. 학과 남자랑 전부 자보는 게 목표라며 졸업할 때까지 남자 친구는 한 명도 없었지만 학교에 모르는 사람은 없었던, 늘 공사다망한 가운데도 동아리일엔 몸 사리지 않고 뛰어드는 여장부 타입의 친구였다. 또 한 명은 전주에서 올라온 부잣집 막내딸에 애교 파트를 맡은 한 살 언니지만 동생 같은 친구였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런지 어떤 꾸중과 막말에도 기죽지도, 주눅 들지도 않고 웃음으로 응답하는, 24시간 해 같은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이었다. 또 한 명은 유일하게 서울 본가에서 가장 멀쩡하게 학교를 다니는 친구였는데, 뭐든지 조용히 끝까지 하는 타입이었다. 우리 모두 찍다가 묻어버리자며 중단한 단편영화도, 숙제라고 만들던 CF 편집도, 손이 너무 많이 가서 때려치운 클레이 애니메이션도 끝까지 혼자 붙어서 해내던 조용한 악바리였다. 그중 마지막이 나고, 그 돌아이들 중에 가장 사차원 돌아이라고 꼽혔다.
이렇게 넷은 수업이 끝나면 약속이 없어도 동아리방으로 모였고, 매일 영화를 보거나 애니메이션을 만들거나 공모전 작업을 하던가 원카드를 했다. 그때 우리 집은 학교와 15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그 가까운 집엘 늦게 들어가는 일이 잦았다. 여느 때와 같이 11시가 훌쩍 넘어 들어간 날 매우 심하게 혼이 났다. 중학교 때부터 독립을 꿈꾸던 나는 그날로 독립을 하겠다 했고, 아빠는 독립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셨다. 돈 한 푼 안 줄 테니 나가려면 나가라는 뜻이었고, 나는 쿨하게 합의했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아빠는 오히려 나를 어른으로 대해주셨다. 다음날 발걸음도 가볍게 짐을 챙겨 동아리방으로 독립했다. 갈아입을 옷 두어 벌과 속옷, 양말, 주머니에 있던 사만 몇천 원이 전부였다. 갈아입을 옷 중엔 집에서 입던 빨간 츄리닝이 하나 있었는데 일년 내내 그 츄리닝만 입어서 별명이 빨간츄리닝이었다. 심지어 그 옷을 입고 해맑게 선배 결혼식까지 갔다.
동아리방에서 기생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대구 친구도, 멀쩡히 자취방이 있는 진주 언니도, 심지어 서울에서 학교 잘 다니던 모범생 친구도 집엘 가지 않았다. 대구 친구는 내가 동아리방에서 사는 걸 보고 영감을 받아 자기 자취방을 빼버리고 들어와 같이 눌러앉았다. 우리는 내내 동아리방에서 함께 지내다가 가끔 진주 언니네 자취방에 씻으러 가곤 했다. 그것도 귀찮은 날엔 학교 화장실에 호스를 연결해서 한 명씩 샤워를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왔는데, 가을이 되니 너무 추워서 대구 친구 외에는 아무도 씻지 않았다. 대구 친구는 열정인답게 소리를 지르며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입술이 파래져서 나오곤 했다. 그 당시 우리가 준비하던 공모전이 하나 있었는데 마감 때문에 거의 씻지도 못하고 7일 밤낮을 하루 20시간씩 작업했다. 그렇게 작업한 애니메이션은 베스트 뮤직비디오상인가를 받았다.
모두 다 돈이 없을 땐, 진주 언니가 선배들을 공략했다. 한 명이라도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다 같이 먹었고, 누군가 돈을 벌어오거나, 용돈을 받는 날엔 술파티였다. 넷 중에 유일하게 회사 다녔던 경력이 있던 나는 그중 돈을 제일 잘 벌었다. 프로그램도 꽤 다를 줄 알았고, 모르는 프로그램의 일을 의뢰받아도 밤새 책 보고 물어가며 어찌어찌 해냈다. 디자인일들은 선배들이 주로 소개해주었는데 대부분 누끼를 따는 일이 많아서 그들 사이에서 '왕따'로 통하며 제법 쏠쏠하게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렇게 1학년이 끝날 무렵까지 동아리방에서의 동고동락은 계속되었다. 한 가지 신기한 건 빨래를 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옷을 빨아 입었을까.
그래도 우리는 많이 깔깔거렸고, 진지하게 작업했으며, 열심히 연애도 했다. 빨간 츄리닝만 입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때 나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나의 독립의 시작은 이러했다. 20여 년 전에 그 독립 덕에 나는 무서울게 별로 없다. 특히 금전적인 부분이 그랬다. 하나도 없어도 잘 먹고 잘 살았던 경험들은 무슨 일이 닥쳐도 꽤나 든든히 나를 지탱해주었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도 즐겁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돈이 없다는 건 별로 약점이 되지 않았고, 제로 베이스로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이 항상 많다고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잘 살아보면, 하나도 갖지 못하는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