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식목일, 서울에서 구례로 이사
사진 앱에서 일 년 전의 사진을 보여준다.
작년 봄 백군과 나는 구례에 여행을 왔었다.
친구 부부가 놀러 가자는 말에 별 생각도 없이 따라나섰던 여행이었다.
여행 내내 우리 넷은 여기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돌림노래처럼 했다.
나는 어쩐지 내가 여기에서 살게 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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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백군과 나는 둘 다 일을 그만두고 다른 시작을 준비해보고 싶었다.
바쁜만큼 돈은 많이 벌었지만 끌려다니듯 살아가는 삶이 어딘가 잘못된 것 같았다.
월급에 의지하는 성실한 삶을 정답이라 여기던 백군은 선뜻 결정을 하지 못했지만, 갑자기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원하는 것은 당장 해야겠다며 마음을 굳혔다.
이십 년 동안 해오던 디자인일을 내려놓고 우리는 먼저, 살 곳을 찾기로 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기에 서울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살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씨트로엥 피카소'에 간단한 캠핑 짐을 챙기고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전국을 다녔다.
그렇게 마지막에 도착한 곳이 구례였다.
구례에서 열곳이 넘는 집을 봤고, 마지막에 본 집이 마음에 들어서 더 이상 보지 않았다.
학교가 옆에 있어 시간마다 종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렸고, 도서관은 걸어서 3분 거리, 섬진강과 뒷산은 10분 남짓, 어떤 방에서든 문을 열면 바로 마당이 보이는, 방도 많고, 문도 많고, 화장실도 많은 미로 같은 집이었다. 당장 이사하고 싶었지만, 살고 있던 사람들의 새 집이 4월에나 완공이 가능하다고 해서 9월에 계약을 하고 4월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4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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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던 우리는 2.5톤의 이삿짐 견적을 받았지만, 6톤 차에 살림살이를 꽉 채웠다. 이삿짐보다 먼저 도착해 예쁜 주민센터에 가서 전입신고를 하고, 이삿짐을 기다리며 동네를 산책했다. 지방은 줄어드는 인구 때문인지 젊은 사람들이 전입신고를 하는 것을 굉장히 반기는 분위기다. 선물로 초록색 종량제 봉투를 10팩이나 받았다.
저녁 7시가 넘어 이삿짐이 도착했고, 다 같이 부지런히 날랐는데도 10시가 다되어 이사가 끝났다.
짐을 옮기면서 우리의 거대한 짐에 몇 번이나 놀랐다. 우리는 미니멀리스트가 아니었다.
화장실을 포함해 3평이 안 되는 가장 깨끗한 방에 딱 필요한 짐만 풀고 나머지는 다른 방에 전부 몰아넣었다.
아직 도시가스를 연결하지 못해서 물을 데워 세수를 하고, 짐 속에서 버너를 찾아내 너구리 순한맛을 끓여먹었다. 캠핑할 때 쓰던 전기장판을 찾아내 연결하고, 난로를 틀어 온기를 만들었다.
튼튼하고 큰 텐트에서 캠핑을 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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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한 다음 날 새 집에서 눈을 떴을 때, '내가 어쩌다 여기에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에 취해 원나잇을 하고 낯선 곳에서 눈을 떠 상대의 벗은 등을 봤을 때,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에어컨을 떼어간 자리에 까만 못 구멍 4개와 큰 구멍은 종이컵으로 막아 둔 것이 눈에 걸린다.
2구짜리 콘센트가 전부인 방에 3구, 4구짜리 멀티탭이 연결되고 3구짜리 멀티탭에 또 3구짜리 멀티탭 2개가 연결되어 정신없이 얽혀있는 전선들도 눈에 걸린다.
상부장 하나와 작은 싱크대, 전자레인지를 두는 하부장 하나가 전부인 작은 부엌에 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들이 엉켜 있는 것도.. 한동안 멍하니 방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을 정리했다.
곧 도시가스가 연결되었고, 인터넷도 연결됐다. 이곳의 말투로 조용히 이야기하는 기사님들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따뜻한 물로 오래 샤워를 하며 차가웠던 몸을 데우고, 노트북으로 음악을 틀었다.
햇볕이 잘 드는 마당에 앉아서 이사로 몸살 중인 화초를 돌보다가 문득 벚꽃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동네 산책에 나섰다.
제일 먼저 도서관에 들려 도서관 이용 카드를 발급받고, 동네분들의 단골집 같아 보이는 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꽃이 많이 폈지요? 어디에서 왔어요?"라고 묻는 사장님의 질문에 "서울에서 어제 이사 왔어요."라고 답하며 조금 설레는 기분이 되었다. 덧붙여 "어제 전입신고도 했어요."라고 말하자 사장님은 "이제 구례 사람이 되어부렸네"라며 웃으셨다. 반갑다 환영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그런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카카오 맵을 켜봐도 될 것을 괜히 사장님께 섬진강 둘레길로 가는 길을 물었다.
섬진강으로 가는 길에,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게 할 예쁜 풍경들을 만났다.
예쁜 풍경의 모투리엔 전부 하얗게 벚꽃이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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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어제와 완전히 달랐다.
이곳에서 눈을 뜬 것이 안심이고 다행이었다.
벚꽃이 완전히 떨어지고 잎이 나기 전까지는 여행자처럼 구례를 산책할 계획이다.
엉망진창인 집은 그다음에 생각하기로.
행복한 날이 오늘 하루뿐이라도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