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 먼저 온 기숙사 친구가 마트에서 물건 살 때의 팁을 알려주었다.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몰라 직원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 순서에 맞게 이 세 가지만 얘기하면 된다고 했다. "네, 아니요, 감사합니다." 굳이 "나는 네덜란드어를 못해요, 영어로 해주세요"라고 부탁해 피차 어색해질 필요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길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직원은 내가 구매할 물건의 바코드를 모두 찍은 다음 그게 전부인지 물을 테니 "네"라고 첫 번째로 대답하면 되고, 계산기에 엔터를 입력해 총액이 얼마인지 화면에 띄운 다음에는 그 값을 불러주고 영수증이 필요한지 물을 테니 "아니요"라고 두 번째로 대답하면 되고, 마지막으로 잔돈을 거슬러 주면서 잘 가라는 인사를 할 테니 "감사합니다"라고 세 번째로 대답하면 된다는 거였다. 교환학생을 하는 내내 매일 같이 썼던 이 방법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추가 질문 없이 너무나 매끄럽게 나는 직원이 영수증을 대신 버려주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산 물건과 잔돈을 받아 나왔다.
그러니까 안녕이라는 일반적인 인사만큼 영수증이 필요한지는 어딜 가든 어김없이 물어보는 것이고, 필요 없는 건 언제나 변함없는 것이다. 현금을 쓸 때야 영수증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요즘엔 카드 결제가 일반적이라 온라인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영수증을 받는 일이 잘 없다. 어렸을 적 아르바이트를 할 때나 입사 초기에는 카드로 결제해도 영수증을 챙겼는데 이건 비용 정산을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급히 내 카드로 긁은 걸 회사에 청구하기 위한 증빙자료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개인 법인카드가 발급되며 필요 없게 되었다. 사적으로는 영수증을 요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있다면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많이 샀을 때 제대로 찍혔는지, 그러니까 과잉 청구되지는 않았는지 한번 확인해보는 용도가 전부다. 사실 이것도 귀찮아서 거의 안 한다.
직원이 카드랑 같이 영수증을 건네면 "영수증은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카드만 받는데, 이건 영수증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못된 버릇 때문에 피하는 이유도 있다. 나는 영수증이 보이면 돌돌 마는 버릇이 있다. 손으로 조물딱 거리면서 영수증을 아주 딴딴하게 말아 끝이 찌르면 아플 정도로 뾰족하게 만든다. 이게 집착 같아서 영수증이 보이면 족족 그렇게 말아버리고, 때로는 불안 증세처럼 어딘가 답답하면 지갑을 열어 혹시라도 무심코 처박아 두었던 영수증이 없는지 찾아본다. 가끔 회사 사람들, 혹은 그다지 친하지 않은 지인들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변태처럼 영수증을 조물딱 거리는 걸 들킬 때도 있다. 내가 결제하고 받은 영수증이 아닌데도, 버리는 것인지 묻지도 않고 영수증을 보관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이럴 때 괴상한 이쑤시개 모양이 되어버린 영수증과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 같은 나를 번갈아 보면서 "뭐 하시는 거예요?"라고 묻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엄청난 치부가 폭로된 것처럼 민망하다.
내가 대단한 환경 운동가는 아니지만 굳이 쓰레기를 만드는 것 같은 모순적인 상황도 거슬리는데, 이런 사적인 이유까지 더해지니 나는 결제를 하자마자 내 의사와 상관없이 디디딕, 하고 올라오는 영수증이 꽤나 불편한 것이다. 탄생하자마자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운명인 영수증이 애석하기도 하지만, 그걸 보면 마치 무인도에서 물 한 모금 갈구하는 표류자처럼 반응하는 내 손가락도 못났다. 그러니까 영수증은 됐으니 견물생심 나지 않게 쓰레기를 만드는 디디딕, 소리는 그만 들리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