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 보려는 마음이 왜 원망으로 끝나는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리는 이 말들은 따뜻한 위로처럼 보이지만, 사실 상대의 영혼을 옥죄는 가장 날카로운 창이 되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고귀한 탈을 쓰고 상대의 자율성을 짓밟으며 정서적으로 지배하는 행위, 우리는 이를 가스라이팅이라 부른다.
가스라이팅의 본질은 상대방을 위축시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드는 데 있다.
법륜스님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관계의 뿌리를 깊이 파헤치면, 그 밑바닥에는 항상 '덕 보려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고 통찰한다.
우리는 흔히 가족이나 연인 사이의 사랑은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생각보다 훨씬 더 철저한 '계산기'를 두드린다.
법륜스님은 현대인의 인간관계가 본질적으로 '상거래'의 속성을 띠고 있다고 지적한다.
누군가에게 정성을 다해 밥을 차려주거나 선물을 줄 때, 마음 한편에서는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지", "나중에 내가 힘들 때 너도 나를 챙겨야지"라는 보상 심리가 작동한다.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정서적 자본을 투입하고 이익(칭찬, 고마움, 복종 등)을 바라는 투자 행위에 가깝다.
투자를 했으니 당연히 수익을 기대하게 되고, 상대의 반응이 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즉시 '억울함'과 '원망'이라는 독소가 온몸에 퍼진다.
내가 세운 기준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고집은 관계 안에서 '심리적 독재'를 불러온다.
"남편은 이래야 해", "자식은 부모 말을 들어야 해"라는 정답지를 미리 정해두고 상대를 그 틀에 맞추려 하는 순간, 사랑은 지배욕으로 변질된다.
법륜스님은 이를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행위'라고 부르며, 이것이 곧 괴로움의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상대를 내 입맛대로 개조하려는 욕구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상대 또한 자기 인생의 주인이며, 그에게는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자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내 기준만을 강요할 때, 우리는 상대를 가해자로 만들고 스스로를 비련의 주인공이라는 감옥에 가두게 된다.
실제 즉문즉설 사례 중에는 위암 초기 판정을 받은 남편을 둔 아내가 있었다.
남편은 투병 중에도 세상에 대한 불평과 남 탓만 일삼았고, 아내는 그를 바른길로 인도하려 애쓰다 지쳐 결국 원망을 품게 되었다.
여기서 스님의 진단은 냉철하다. 아내는 남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내 마음에 드는 환자'로 만들려 했다.
남편이 욕을 하든 불평을 하든 그것은 남편의 인생인데, 아내가 그 '업'을 대신 짊어지려 하며 통제하려 들었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 것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내 식대로 바꾸려 하는 헌신은, 결국 독이 든 음식을 나 자신에게 먹이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부모를 원망하는 많은 자녀가 빠지는 함정이 바로 '500원의 비유'다.
우리는 부모에게 1,000원(완벽한 사랑과 지원)을 기대했는데 부모가 500원(생존과 기본 양육)만 주었다고 해서 평생을 원망하며 산다.
사실 길 가던 사람이 500원을 주면 고맙다고 절을 할 사람들이, 정작 자신을 먹여 살리고 키워준 부모에게는 1,000원을 안 줬다며 가해자 취급을 한다.
만약 내가 받지 못한 500원에만 집중하면 나는 평생 상처받은 피해자로 남게 되지만, 이미 받은 500원의 은혜에 집중하면 비로소 원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모님이 처했던 당시의 혹독한 환경(가난, 차별, 무지 등)을 이해할 때, 비로소 상처 입은 내 안의 어린아이도 치유될 수 있다.
이 지독한 '보상 심리'와 '거래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무언가를 주었다는 생각(상)조차 없이 베푸는 태도를 의미한다.
마치 내 손으로 내 얼굴을 씻고 나서 손이 얼굴에게 "고맙다고 해라" 혹은 "나중에 너도 나를 씻겨줘라"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상대가 필요한 일을 그냥 나의 일처럼 하고, 그 즉시 잊어버려야 한다.
만약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멈추지 않는다면, 차라리 가족을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비즈니스 파트너'로 대하며 계산을 정확히 하라는 것이 스님의 조언이다.
어중간하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뒤돌아 원망하는 것보다, 차라리 거래의 관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서로에게 덜 해롭기 때문이다.
결국 관계의 고통은 상대를 내 마음대로 하려는 오만함과, 내가 베푼 것에 대한 본전 생각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내 기준에 맞게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 수 있도록 그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서운함이 올라올 때, 그것은 상대의 잘못이 아니라 내 안에 숨겨진 '투자 성공의 욕망'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나의 집착을 기꺼이 배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온을 얻을 수 있다.
행복은 타인의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거래 명세서를 찢어버리는 그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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