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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Dec 17. 2023

바흐를 좋아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eQPUvQVXw58&t=1832s&ab_channel=DeutscheGrammophon-DG

서울 공연 실황, 본격적인 연주는 21분부터


지난여름인가, 감독님과 대화를 할 때  바흐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 바흐를 좋아한다기 보다 조심스럽게 활주로에 랜딩 하는 듯한 BWV988의  첫 곡과 노을이 질 때 산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듣는 G 선상의 아리아는 마치 내가 저물어가는 태양이 된 듯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호접몽 같은 몰아 입체감과 마치 컴컴한 우주 속에서 한 점의 먼지가 되어 스르륵 페이드아웃되는 느낌이 드는 25번 변주곡 등 특정곡을 좋아한다. 

이런 식의 논리로 따지면 브람스, 비발디, 에릭 사티에, 드뷔시, 차이코프스키, 슈만 등 그들의 음악 중 내가 좋아하는 곡이 따로 있을 뿐이다. 나의 기준에선 봄에는 슈만의 트로이메라가 생각나고 여름엔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이 생각나고 가을엔 에릭 사티에 와 드뷔시가 생각나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엔 묵직한 바흐가 생각이 난다. 

한 시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정말 숨 막히게 그의 연주에 집중했다. 꼴딱 침을 넘기는 소리가 다른 관객들의 청음에 방해될까 봐 이마저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얼음과 불을 연상시키는 비킹구르의 연주는 이천 명이 넘는 관객을 한 시간 반 동안 인질로 잡아 콘서트홀에 있는 모든 이들을 한 번에 제압했다. 마치 초한지나 삼국지에 나오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이라는 표현을 현대에 있어서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FsGcBeWAzM&ab_channel=V%C3%ADkingur%C3%93lafsson-Topic

25번 변주곡

하나의 점이 되어 빛이 안 보이는 무한의 영역으로 끝없이 내려가는 느낌, 마치 영화 에일리언에서 리플리가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안고 긴 동면에 들어가면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사라져가는 우주선의 뒷모습을 끝으로 특유의 첼로 시그널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  프리다이버가 되어 깊고 어두운 마리아나 해구의 끝을 향해 내려간다는 느낌이 맞을까. 간결하고 아름다운  bwv988과 대조적으로 사뭇 비극적인 255가 나에겐 더 맞았다. 

공연이 끝나고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됐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 나의 겨울의 첫 신호탄이 바흐라는 사실에 사뭇 재미를 느끼며 감독님과 독한 소주를 마시러 종각에 갔다. 역시 바흐엔 꼬린내나는 화목순대국이지 하면서, 소주는 역시 고뿌(컵)에 빨간색 참이슬이지 하면서, 이 연주회에 제법 어울렸던 크리드를 뿌린 나 자신을 칭찬하면서, 뻔한 향수 냄새가 싫어서 일부러 줄담배를 피우는 내 뻔뻔함을 비웃으면서, 삼십 대 중반을 마침내 관통하는 그 자리를 슬퍼함과 동시에 축하하면서, 나이를 뛰어넘어 훌륭한 어른이 내 친구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잉에 보르케의 삼십 세의 한 구 절을 떠올리면서. 

피 끓는 에너지가 내 몸과 마음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내고, 비로소 텅 빈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여백이 보이고 그 공간을 향해 달려나갈 준비를 하는, 더 이상 젊지도 늦지도 않는, 경계에 선, 뜨거운 피가 멈추는, 어떤 멸망과 시작에 대한, 어떤 시기를 끝내겠다는 불가능한 시도를 멈추고,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겠다는, 바흐의 곡을 자유자재로 변주하는 비킹구르 울라프손을 보며.

이렇게 겨울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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