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의 철학>
책을 읽다 보면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불현듯 '가만, 이거 내 얘기잖아?' 하는 기묘한 느낌을 받는 때가 있다. 이 책도 그랬다. 그러나 의문이다. 서문의 첫 문장부터 “이 책은 철학서다”라고 아예 못 박고 시작하는 책이 어째서 내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을까?
나는 여행을 떠났었다. 3년 가까이 유럽과 아프리카를 떠돌았다. 유난히 지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던 과거의 나 자신에게 너무 늦은 답장을 보내듯 떠난 여행이었다. 특별한 목적도 기대도 없이 여행길에 올랐지만 한 가지 원칙은 있었다. ‘관조적인 구경꾼이나 경박한 관광객만큼은 되지 말자.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 수 없게 되면 지체 없이 돌아오자.’고 다짐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쌩판 처음 방문한 타국의 맥락을 모르는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것들의 의미를 모른 채 무심히 지나치거나 그저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혼잡스러운 대도시든 황량한 시골이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막막함 앞에서는 '론니플래닛'이나 '트립어드바이저'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물리적·정서적으로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가끔 어느 한 지역에서 몇 주 이상 길게 머무르게 되면 교통체증, 장바구니 물가, 정전의 빈도, 아침 공기질 같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신경 써야만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내 삶의 맥락을 완전히 벗어난 엉뚱한 곳에서, 낯선 이들 사이에 불쑥 끼어들어 무심한 구경꾼, 얼뜨기 관광객, 무모한 탐험가, 불만투성이 임시 체류자로 살아가는 경험과 정서가 한데 뒤섞여있는 기이한 시간, 그것이 여행이었다.
여행의 기억 대부분은 여전히 내게 미스터리한 것으로 남아있다. 단순히 일어났던 일들을 서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것에서 무언가를 길어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행기를 쓰며 느꼈다. 직접 몸으로 살아낸 시간조차도 어떤 상을 맺고 체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듯하다.
나로서는 책의 제목만으로 흥미가 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 책은 기행문도 아니고 관광이나 관광산업에 대한 얘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관광객의 철학'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책의 서두에 왜 저자가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기 위해 '관광객'이라는 용어를 동원하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완전히 설득당했다. 그 뒤로는 책에 빨려 들어가듯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오묘한 논의를 더듬더듬 좇는 내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러다 각주의 한 문장을 읽고 이 책을 통째로 내 이야기로 바꿔 읽어도 무방함을 확신했다. “‘관광객’은 작은 인류학자여야 한다.” 이 한 문장을 통해 나는 이 책과 온전히 마주했다.
아즈마 히로키가 ‘관광객’이라는 다소 경박해 보이는 존재를 두 가지 이유로 진지하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하나는 단순히 근대 소비사회의 산물로만 치부되는 ‘관광객’의 독특한 존재양식이 가진 가능성에 주목하기 위함이다. 저자는 특정 공동체에만 속하는 ‘마을 사람’도 아니고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 ‘나그네’도 아닌 “특정 공동체에 속하면서 때때로 다른 공동체에 들르는” ‘관광객’이라는 독특한 존재를 통해 ‘지구화’를 사유하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온갖 이념이 뒤섞여 혼란만 가중시키는 '타자'라는 용어를 '관광객'으로 갱신하여 그것을 통해 새로운 '타자론'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21세기, 전 세계가 '타자와 함께하는 데 지쳤다'라고 외치는 지금 자국우선주의와 배외주의가 또다시 만연하고 있다. 저자는 이것을 명백한 '사상의 패배'라고 평가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관광객의 철학'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타자론'을 정초하고자 한다. 이는 '관광', '관광객'의 경박함을 통해 '타자와 함께하는데 지친' 이들이 '타자를 소중히 하라'는 진지한 명제의 '뒷문으로 다시 들어가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1부에서는 루소와 볼테르, 칸트와 헤겔, 슈미트와 아렌트, 네그리와 로티 등 여러 사상가들을 비스듬히 관통하며 '가족-시민-국민-세계시민'이라는 단선적인 회로를 통해서만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노동하고 소비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 갇혀있는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의 '2층 구조'를 밝힌다. 여기서 '현실의 2차 창작자인 관광객'이라는 존재가 인간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다른 회로의 가능성으로 등장한다. 더 나아가 '관광객'과 능동적인 '오배'(誤配 : 잘못 발송된 우편)라는 개념으로 타자와 연대에 대한 대안적인 정치사상의 토대를 사유한다.
저자는 21세기를 “자유롭지만 고독하고 긍지 없는 개인(동물)으로 살지 아니면 동지도 있고 긍지도 있으나 결국은 국가에 봉사하는 국민(인간)으로 살지”, 이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없는,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의 '2층 구조'에 갇힌 시대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저항은 글로벌리즘의 제국과 내셔널리즘의 국가 틈새에서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그 저항을 실천하는 주체의 형상이 바로 제국과 국가를 거리낌 없이 넘나들며 우연적인 오배들을 만들어내는 '관광객'인 것이다.
"관광객은 대중이다. 노동자이자 소비자다. 관광객은 사적인 존재고 공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 않다. 관광객은 익명적 존재며 방문한 곳의 주민과 토론하지 않는다. 방문한 곳의 역사에도 정치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관광객은 단지 돈을 쓸 뿐이다. 그리고 국경을 무시하며 지구상을 넘나 든다. 친구도 적도 만들지 않는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들뜬 존재인 '관광객',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적과 동지'라는 이항대립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섣부르게 편을 가르지 않고 판단을 보류하는 존재, 세계의 절대성과 원리주의 앞에서 언제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존재, 스스로의 신념과 판단이 가진 특수성과 결여를 염두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존재가 바로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관광객'의 모습이다.
관광은 “원래 갈 필요가 없는 장소에 기분에 따라 가서,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고,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이 불필요성과 우연성에서 기인하는 오배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관광객의 철학'의 핵심이다. 여기서 오배란 '목적에 도달하지 않는 것' 즉 '쓸모없음'을 말한다.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뜻밖의 것들을 동반한다. 처음 목적에서 벗어난 뜻밖의 것들이란 어느 정도 어설프고 경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재해석할 때 촉발되는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창조와 사유를 가능하게 만든다. '관광'은 그런 뜻밖의 것들과의 마주침에 대해 열려있는, 오배의 실천적 형태인 것이다.
“만날 일이 없었을 사람과 만나고 갈 일이 없었을 곳에 가고 생각할 일이 없었을 생각을 함으로써, 제국 체제에 다시금 우연을 도입하고 집중된 가지를 바꿔 연결해 우선적 선택을 오배로 되돌리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그런 실천의 누적을 통해 특정한 꼭짓점에 부와 권력이 집중하는 현상에는 어떠한 수학적 근거도 없으며 언제든 해체하고 전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 즉 지금의 현실은 최선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항상 상기하게 하고자 한다."
분명 난해하고 모호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경쾌하고 속도감 있으면서도 예리하고 유연하게 논의를 발전시키는 저자 특유의 필치 덕분에 막막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 책을 아직 구상에 불과한 스케치 정도라고 자평하지만 그것의 비약과 단절을 감안하더라도, 지금까지 그의 여러 저서에 흩어져있던 논의들을 집약하고 그것에서 어떤 전환점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관광객의 철학>은 그의 주저라고 꼽을만하다. 반드시 쓰일 수밖에 없을 다음 책을 기다리며 여러 번 재독 해야겠다.
이 책의 2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2부는 여러모로 1부를 직접 통과하여 건너온 사람들에게 읽힐 것을 상정하고 쓰였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오배적 다중으로서 '관광객'이 재발명해야 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단서를 남긴다.
저자는 세계화에 대한 반발로 배외주의가 다시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2017년에 이 책을 썼다. 팬데믹을 겪고 있는 지금, “21세기는 관광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라는 저자의 말이 다분히 빗나간 발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바이러스의 대유행으로 인해 세계의 단절과 배외주의가 더욱 빠르게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관광객의 철학>은 분명 2020년에도, 아니 오히려 2020년이기 때문에 더 유의미한 '오배'로써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