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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jActivity Dec 10. 2020

빛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삶, 난반사하는 생의 파편들

<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그래도 겨울이고 연말이라고 잊고 있던 습관이 불쑥 튀어나오듯 한 해를 돌이켜 보게 된다. '올해는 뭐가 좋았더라?' 생각을 하다가 '일단 영화는 ‘벌새’가 좋았지' 하고 은희와 영지 선생님의 편지를 떠올렸다.


  올해는 영화를 몇 편 못 봤다. 팬데믹 때문에 극장에는 거의 발길을 끊었고, 잡생각이 많아져서 인지, 유튜브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집중해서 보기가 힘들었다. 나는 영화를 중간에 끊어서 나눠 보는 것도 싫어하고, 어수선하고 멍한 상태로 덧없이 영화를 흘려보내는 것도 싫어하는데, 그 탓에 오히려 영화를 더 못 보게 되었다.


  작년에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친구가 '벌새'가 아주 좋았다고 귀국하면 꼭 보라고 했었다. 예전 같았으면 득달같이 보고 '덕분에 영화 잘 봤다'는 메시지를 남겼을 텐데, '벌새'는 미루고 미루다 결국 올여름이 되어서야 보았다.

  영화를 틀자 화면 구석의 러닝타임이 눈에 들어왔다. 2시간 18분, '첫 장편으로 138분짜리를 영화를 내놨다고?! 중간에 흐트러지면 안 되는데...' 걱정이 앞섰다. 기우였다. 넋을 놓고 봤다. 다음 날 한 번 더 봤다.

  며칠 전, 올해의 영화로 '벌새'를 떠올리고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는 이름의 단행본으로 나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만으로 충만하고 좋았는데, 굳이 시나리오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까 괜히 감상을 망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것도 역시 기우였다.


  영화에 군더더기가 많고 필요 이상으로 늘어진 장면들이 많아서 러닝 타임이 긴 것은 아닐까 하고, 보기도 전에 공연히 우려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 영화는 늘인 게 아니라 도리어 군더더기를 빼고 아끼는 장면 하나하나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금씩 깎고 또 깎아서 2시간 18분으로 줄인 것이 분명했다. 감독의 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에 대한민국의 영화계는 2시간이 훌쩍 넘는 신인감독의 영화를 순순히 극장에 올려주는 곳이 아니다. 삭제된 분량이 포함된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역시 그랬다. 빠진 부분들이 못내 아쉬웠다.

  영화 한 편 전체의 시나리오를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글의 디테일이 빼곡한데도 행간의 공간은 어쩐지 넉넉하게 느껴졌다. 담백한 언어로 그려진 장면들 속에서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과 조우하고, 영화에서는 미묘하게 달라진 시나리오의 원래 대사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끝까지 읽었다.

  이 시나리오를 완성하기까지 김보라라는 한 사람이 마주해야 했을 지난한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집요하게 자신을 추궁하는 먹먹한 과거의 기억과 감정들에 직면한 채, 그 속에서 떠다니는 부스러기들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배열하고 흩트리기를 무수히 반복하는 시간. 그는 과거의 자신과 시대 속에서 잊혀버린 것들을 기필코 발굴해야만 하는 고독한 고고학자의 심정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고치고 지우고 다시 쓰고 고치고 또 고쳐 써야만 했을 것이다.


  시나리오에 이어 책의 뒷부분에는 영화에 대한 네 사람의 감상, 그리고 김보라 감독과 그래픽 노블 작가 앨리슨 벡델의 대담이 실려 있다. 최은영 작가와 김원영 변호사의 책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 덕분에 그들의 감상을 읽는 것이 꼭 아는 사람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 반가웠다. 올해가 가기 전에 가까운 이와 술 한 잔 하며 '벌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소소한 바람이 있었는데 이렇게나마 이뤄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시나리오의 디테일을 더욱 구체적이고 생생한 것으로 만들고, 행간을 인위적, 우연적 요소들로 조화롭고 충실하게 채우는 것이 시나리오를 영화라는 전혀 다른 물질로 번역하는 것이라면, 감독은 그것을 정말이지 훌륭하게 해냈다. '벌새' 단순히 시공간을 도약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시절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에게 보이지 않았던 존재와 순간들을 바깥이 아닌 안으로부터 들여다보게 해주는 기묘한 타임머신 같은 영화로 완성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정면에서 은희를 응시하고 있던 화면이 암전과 함께 사라지자 내 안에 불현듯 타임머신이 나타났다. ‘벌새’가 1994년, 15살의 은희가 스스로조차 하찮게 여겼을, 그래서 잊혀 있었을 삶의 파편들을 조심스레 그러모아 충만하고 진지한 삶의 서사로 승화시켰듯, 나의 타임머신도 내가 살아냈던 시간들로 나를 이끌었다. 그곳에서 나는 그 시절 나를 그토록 외롭고 서럽게 만들었던 삶의 내밀한 부스러기들과 서먹하게 다시 마주했다. 아무렇게나 난반사하는 이 탁하고 축축한 부스러기들을 오롯이 거두어 품고 살아갈 수 있다면, 내 삶도 언젠가 빛날 수 있을까?

  다시 시공간을 뛰어넘어 이제는 나를 벗어난다. 도착한 곳은 나의 가족과 내가 아끼는 이들, 그리고 잠시 내 삶에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의 세계, 무수한 삶의 편린들이다. 각자의 시공간으로부터, 제각기 다른 서글픔을 머금은 삶의 부스러기들을 품고, 그들이 내게로 온다. 그렇게 나는 내 안에서 모두와 만난다. 이내 떨리는 듯한 피아노 소리와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모두 다 여기 있다."



Matija Strniša, "Everyone is Here"

https://soundcloud.com/matijastrnisa/hoh-m16-everyone-is-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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