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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jActivity Mar 18. 2021

은둔지에서 보내온 유리병 편지

<은둔기계>


  독서란 ‘유리병 통신’과도 같다. 바닷가를 거닐다 파도에 표표히 떠밀려온 유리병 안의 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읽게 되고야 마는 것.


  손에 든 눅눅한 편지의 내용은 막연하다. 마치 암호문과 같다. 나를 상정하고 쓰였을 리가 없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의미도 알아채지 못한 채 읽어 내려가는 문장들이 아주 우연히도 내 삶의 어떤 서사와 맥락들과 뒤섞이며 하나 둘 복호화되기 시작한다. 해독된 암호문 위로 어떤 상(像)이 맺힌다. 상의 서어함과 생생함이 침습적으로 삶의 맥락을 교란하고 서사의 흐름을 비튼다.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유리병을 건져 올려 편지를 꺼냈다. 거기에는 정교한 암호로 쓰인 단상들이 잘게 흩어져 있었다. 남루한 삶을 그러모아 문장들과 마주했다. 막막한 활자들 사이에서 길어내어 조우한 몇몇 문장들 뒤로 달가운 미소가 따랐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어떤 경우 ‘연결하고’ 어떤 경우 ‘연결을 끊는’ 동물, 은둔할 줄 아는 동물이다,” -p.56


  몇 해 전, 나는 그때까지의 삶의 맥락에서 퇴거했다. 정확히는 퇴거를 위한 조건들을 사방팔방에 공들여 배치한 끝에 가까스로 퇴로를 확보했다. 그리고 은둔 중이다.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자연인이 되었다거나 하는 그런 시시한 얘기는 아니다. 연결될수록 폐색 되어가는 기왕의 삶의 네트워크를 재배치, 재조립하기 위한 퇴거이고 은둔이다. 삶에는 오로지 ‘은둔-노출-도주’의 쉼 없는 반복을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있다.


  삶의 전면적 노출, 전방위적으로 얽혀 들어오는 연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고립과 은둔을 간신히 나마 유지하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희미하게 탈주로를 식별하고 있을 수 있다. 흡사 토끼굴의 지혜, 원리주의와 확증편향적 강박의 내파를 예비하는 응축된 정동.


  과잉, 과속, 과열로 대표되는 ‘제시된’ 라이프 스타일의 말로는 범람하는 정보(노이즈)의 재앙적 쓰나미, 그리고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착취적 삶에 수반하는 공허와 황폐화다.


  감각적, 직관적으로 이 시대의 파국을 감지한 자들이 은둔하는 보로메오 매듭 ‘생태주의’, ‘페미니즘’, ‘반자본주의’.


  불굴의 낙관주의자들이 짊어진 엄혹한 덕목으로서의 비관적 리터러시.


  인간형 은둔기계들과의 자잘한 공명

  싯다르타, 묵자, 디오게네스, 미겔 데 세르반테스, 프레드리히 니체, 프란츠 카프카, 페르난두 페소아, 모리스 블랑쇼, 에릭 호퍼, 비비안 마이어, 어슐러 르 귄, 마흐무드 다르위시, 스티븐 호킹, 브라이언 이노, 윌리엄 바신스키, 안노 히데아키, 장률, 에이펙스 트윈, 이송희일, 사사키 아타루, 한받...


  어떤 은둔의 대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철저하게 은둔했기 때문에 도리어 발각되고야 만다. 꼭 그들이 인간일 필요는 없다.



  머리맡에 둘 수 있는 또 하나의 은둔지를 발견했다는 임시적 안도감.


  이 세계에 항구적 접점 없이 흩뿌려진 다른 아군들이 은둔하는 도주의 바다에서 이 ‘유리병 편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희망.


  은둔과 도주의 반복 속에 이미 존재하는 자유를 발견하고 주저 없이 만끽할 것, 그리고 때가 되면 지체 없이 떠날 것.


"고독은 혼자 있는 자의 심정이 아니라, 욕망하지 않는 것과의 연결을 끊은 자가 확보한 자유다. 이 자유는 새로운 연결 가능성에 뿌리내린다. 우리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을 때 더 많이 연결될 수 있다."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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