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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멀스멀 Nov 10. 2018

이별이 당연한 아이들

몽골의 고아원에서 배운 것들

 울란바토르에서 테를지 국립공원 Terelj (테를지인지, 테레지인지 혹은 테레즈인지 모르겠다)으로 넘어가는 길, 우리네 서낭당 같은 곳이 있다. 버스에서 내려 둘러보면 기념품을 파는 작은 게르와 여행자가 안전을 비는 돌탑, 그리고 언덕 아래 펼쳐진 강과 주변의 마을 풍경이 보인다. 쨍한 햇살이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생경한 풍경.


테를지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서낭당
서낭당에서 내려다본 풍경


 언덕을 내려간 차가 평야를 달릴 때 우측으로 나란히 달리던 기차는 너무나 비현실 적이라 애니메이션 같았다. 왼편으로 펼쳐진 끝없는 초원은 원근감을 느낄 수 없어 마치 시야의 끝에는 벼랑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내 도착한 게르촌에서 말을 타고 초원을 내달릴 땐 방위에 대한 개념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깊은 밤 일행과 게르 앞에 마주서 얘기를 나눌 땐 상대방 머리 뒤로 쉼 없이 떨어지는 별똥별들을 보았다.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마치 수평으로 날아가듯 보이는 별똥별. 그리고 게르촌 안으로 들어온 야생 동물들. 며칠 머물지 않은 몽골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큰 기억들은 이런 것들이다.


게르촌으로 향하는길 애니메이션 같던 기차와 하룻밤 머문 게르


 내 감각과 감정을 통틀어 몽골이란 이름으로 가슴에 박힌 건 테를지로 향하기 하루 전 오후였다. 울란바토르 한 편의 고아원과 기술학교 사이의 골목에서, 나와 단원들은 아이들과 밝게 웃으며 장난치다 헤어졌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나는 짐짓 울지 말아야지 싶었지만 나도 고개 돌려 눈물을 훔쳤다. 우리 모두가 아침의 결심과는 다르게 드러내 눈물 흘리며 잡은 손을 놓지 못하기도, 혹은 대열을 이탈해 홀로 흐느꼈다. 이별이란 그렇게 필연적으로 눈물을 가져오나 보다. 그런데 아이들은 누구도 울지 않았고 놓지 않으려는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그들의 세계로 달려 사라졌다. 그 순간에는 우리 누구도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뒤늦게 들어간 대학에서 학교 이름을 걸고 몽골로 봉사활동을 가게 됐다. 1학년이지만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교수님께선 나를 단장으로 앉히셨다.(보통 대학 봉사판에선 교직원이 단장이고, 결국 동갑내기 고학번 친구와 함께 타이틀을 나눴다.) 몽골의 한 기술학교와 고아원의 도서관을 정비해주는 게 목적이었던 우리의 여행은 시작부터 어려웠다. 경험자가 적고, 사전 준비가 어렵고 다 치워놓고... 인천공항에서 발권 중에 여행사 사장이 말했다. "준비했던 숙소에 문제가 생겨 새로운 숙소로 구했습니다."


 예약했던 숙소와 봉사지, 인터넷을 통해 찾은 현지 한인들과 연락해 교통편과 식당 등을 미리 알아두었는데 모두 쓸모 없어진 거다. 거기다 새로 구했다는 숙소를 구글링 해보니 샤워시설도 없는 수준의 숙소였다. 우리가 지불한 돈이 있기에 여행사 사장을 닦달하자 우리가 몽골에 도착할 때까지 새로운 숙소를 구해놓겠단다. 그렇게 우리는 불안감을 안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울란바토르 공항에 마중 나온 현지 여행사 직원을 따라 시내의 호텔에 도착해보니 다행히 좋은 숙소가 마련돼있어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숙소에서 봉사지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를 알아내야 했는데 주변의 삭막함에 겁이난 우리는 소수로 정찰조를 꾸려 주변을 파악했고 시내버스 종점 혹은 기점 같은 곳을 찾아냈다. 영어와 지도, 바디랭귀지로 대화가 될 줄 알았는데 기사들과 단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다. 그때 지나가던 몽골분이 반가운 한국어로 말을 걸고 도움을 주셨다. 그녀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했었다며 시내버스기사와 흥정을 하더니 노선버스를 마치 택시처럼 이용할 수 있게 해 줬다. 노선버스를 택시처럼 이라니, 평생 다시 못할 경험 같은걸 몽골에서는 여러 번 할 수 있다.


삭막했던 숙소 주변과 고가 아래의 버스 종점(같은 곳)


 우리의 봉사지는 울란바토르 한편에 위치한 고아원과 기술학교였는데 한 가톨릭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기술학교에 도서 기증과 함께 도서관 시스템의 기본을 잡고 고아원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주된 활동이었다. 신부님들을 뵙고 시설 견학을 하고 앞으로의 일정을 짠 뒤 비행기에서 만난 근처 국립대 교수까지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돌아가는 길이 문제였는데 신부님들께서 두 대의 차량으로 나눠 태워다 주신 다기에 안심하고 조수석에 올랐다. 학교를 벗어나 조금 달리던 신부님께서 갑자기 길 안내를 해달라셨다. 놀라 길을 모르시냐 물으니 몽골에 온 지 이틀째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걱정하지 마 우리는 아직 울란바토르 안에 있으니까." 휴대폰 불빛으로 지도를 살피고 주변을 살펴 돌고 돌아 겨우 숙소에 닿았다. 정말이지 쉽지 않은 여행이다.


 길지 않은 기간 아침저녁으로 오갔던 학교에서 우리는 즐겁고 행복했다. 오 가는 길 이용한 버스를 개조한 노면전차의 경험도 신기했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준비했던 활동도 잘 진행되었다. 아이들과 연을 만들고 마당에서 띄웠을 때 제대로 나는 연이 없이 죄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우리는 좌절했지만 아이들은 연을 땅에 끌고 연신 신나게 내달렸다. 연이 잠시 떠오르든 바닥에서 끌리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함께 공놀이 할 때는 골을 넣고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몸 비비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겐 충분했다. 며칠 새 유독 잘 따르는 아이들이 생기고 이름도 얼굴도 금방 익숙해진다. 이런 활동에선 고르게 대하는 게 중요하고 깔끔하게 관계를 끝맺는 게 중요한데 이때의 우리는 머리로 알면서도 미숙했다.


버스를 개조한 울란바토르의 노면전차
연과 함께 뛰어노는 아이들


 아이들이 연을 끌고 내달리던 골목에서 우리는 인사했다. 며칠 새 정든 우리는 눈물을 참지 못했고 이별이 아쉬워 손을 놓지 못했지만 웃으며 포옹한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달려갔다. 다음날 밤 화덕이 뜨겁게 타오르던 게르에 둘러앉아 우리는 생각했다. 왜 아이들은 그렇게 쉽게 돌아섰을까? 우리와 헤어지는 게 아쉽지 않았던 걸까? 많은 생각 때문인지 기울이던 술잔 때문인지 평생 처음 보는 황홀한 별밭에서 사진 하나 남기지 못하고 밤을 보냈다.


 나중에서야 바보 같은 질문의 답을 알게 됐다. 우리 같은 뜨내기들은 며칠이면 떠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이들이다. 해맑게 뛰어놀던 그 맑은 아이들은 애당초 가장 아픈 이별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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