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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gongnyeon Aug 07. 2023

이럴거면 왜 나왔을까?

10시간 걸려 도착한 북인도 심라, 그 친구가 심라로 간다길래 무작정 따라온 동네였다. 호스텔도 꽤 마음에 들고, 동네도 나쁘지않고, 무엇보다 차에서 잤더니 쉴 수 있는 하루가 더 필요했다. 옛날에는 하루 야간이동하고 이동한 날 하루만 쉬면 오케이였다. 이제 나는 다듀다. “하루를 밤을 새면 이틀은 죽어. 이틀을 밤새면 나는 반 죽어” 이제 하루를 제대로 못 자면 회복하는데 이틀이 필요한 사람이다. 이건 슬픈 자기소개서다. 


도미토리에서 만난 독일인 친구와 같이 아침을 먹다 근처 사원을 가기로 했다. 경유차 심라에 와서 바로 더 높은 지대로 떠날려고 했던 한국인 친구는 예기치 못한 고산병으로 숙박을 연장했다. 그렇게 셋이 모여 작은 여행을 떠났다. 세계공용어는 아직도 한국어가 아니라서 힘들었다. 어떤걸 표현하기 위해 머리를 써야한다는 사실은 피곤하고 지쳤다. 그러다 대화를 포기하고 싶어져서 몰래 도망다녔다. 사진과 영상 찍는거에 더 집중을 하고, 둘이서 계속 대화를 하도록 의도적으로 혼자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직 인도여행에 긴장이 안 풀린 상태에서 계속 뇌를 쓸려고 하니 빠르게 지쳐갔다. 쾌적한 호스텔 방 안, 내 침대에 붙어있는 커텐을 반틈 쳐두고 영상 편집을 하던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아무것도 없는 쉼이 필요해서 델리만 도망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영어라는 새로운 벽에 부딪히다니. 조금 절망적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틀이 지나면 난 다시 혼자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닐테니까. 그땐 영어를 하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적당히 들리는 이야기에만 반응을 하다가 저녁을 따로 먹겠다며 빠졌다. 궁금했던 책방도 구경하고 목적없이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잊고있던 여행의 즐거움을 찾았다.


길거리 한 구석에 좌판을 깔아두고 옷을 무더기로 올려두고 판매했다. 동묘처럼 막 골라골라 오천원 느낌이였는데, 예쁜 스웨터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완전 크리스마스잖아. 아직 9월이지만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합리적 소비였다.  손을 뻗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빨랐다. 그 사람이 꼼꼼히 니트를 봤다. 나는 제발 사지마세요. 아니아니. 제발. 별로인 것 같은데. 아니아니요 아닐걸요. 내 간절한 속마음과 달리 그 사람은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사장님께 저런 니트 또 없냐고 물어봤지만 여기에 있는게 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알아서 잘 뒤져보라는 말. 운 좋으면 또 만날 수 있고, 별로면 못 건진다는 의미였다. 첫 눈에 너무 예쁜걸 봐버려서일까 다른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제발 하나만 건지게 해주세요. 절박한 마음으로 뒤적이는데 뒤에서 구호가 들린다. 구호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 선거철이다. 포스터는 몇개 봤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유세활동하는건 처음이라 신기했다. 그들의 구호를 배경음악삼아 뒤적이다 탑텐, 유니클로 상품들을 발견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혼자 반가운 마음에 실실거리다 자리를 떠났다.


발이 닿는대로 걸어가다 현지인들이 자주 이용할 것 같은 골목길에 도착했다. 조그만한 수선집, 이발소, 생필품을 파는곳을 지나 계속 걸어갔다. 과일시장이 나왔다. 시장 초입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초입에는 기념품, 숄, 옷들을 주로 볼 수 있었다면 깊숙이 들어갈수록 우리가 살면서 매일 소비해야하는 물품들이 더 많이 보였다. 그걸 보는것만으로도 아, 이제 동네에 왔구나.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나의 집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지만.


길 따라 쭉쭉 더 들어가보니 과일과 채소 파는 시장이 이어졌다. 이것만 보고 집에갈까. 여긴 어디쯤이지 휴대폰을 꺼냈는데 반응이 없다. 폰이 꺼진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정신 빼놓고 돌아다니는 사이 길 잃고, 폰은 꺼지고, 세상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내가 묵은 호스텔은 여기가 아닌 저 위쪽 동네라는것만 알고 이름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겁나지 않았다. 집이야 어떻게든 갈 수 있겠지. 한 발자국 뗄 때마다 헬로헬로, 너 인도 처음이야? 어디 갈거야? 물어보는 사람들이 없어서, 누가 날 등쳐먹을지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아도되서 그런걸까. 길 잃어버리는건 큰 문제가 아니였다. 아무나 붙잡고 저어-기 꼭대기 위에 있는 엄청 큰 호스텔 어떻게 가요? 라고 물어보면 누군가는 알겠지 싶어 두리번거리다 노을이 보였다. 아 예쁘다. 지친 몸을 이끌고 버스를 타면서 자다 깨다 만나는 노을은 아니였지만 황홀했다. 황홀함에 취해 과일시장까지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싱싱한 과일과 그걸 사고 파는 현지인들을 보니 나도 그들의 일상에 함께하고 싶어졌다. 오늘 저녁은 과일이다. 홀린듯 정해진 나의 저녁. 신나서 과일을 이것저것 샀다. 너무 신났을까. 가방도 없으면서 손에는 고프로, 지갑, 휴대폰, 여러 봉다리가 늘어나고 있다. 마지막 과일을 살 때는 쥐어줄 손이 없어서 상점 주인과 같이 어떻게 들고갈지 고민하기도 했다. 과일가게를 지나고나자 싱싱한 채소가 줄지어 있었다. 여기서 에어비앤비 하나 구해서 요리 해먹으면서 좀 지내볼까? 빨리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서 장보고 요리해먹고 싶었다. 아, 이럴거면 멀쩡한 집 다 정리하고 왜 나왔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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