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바르샤바에서의 1박은 우리의 의지로 정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바르샤바 공항에서 2시간 경유 후 곧장 빈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약한 항공편이 사라지면서, 하루 일찍 도착해 바르샤바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오후 5시 반에 공항에서 내린 뒤 다음날 이른 새벽에 다시 공항으로 향해야 했기에 그다지 유의미한 스탑오버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보기로 했다. 가능한 만큼 바르샤바 시내를 돌아다니고, 맛있는 저녁식사도 하기로 했다. 폴란드식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것이었다.
"저녁이라도 맛있게 먹자! 비고스는 꼭 먹어야 해."
폴란드 바르샤바도, 오스트리아 빈도, 나는 모두 7년 전에 방문했던 곳들이다. 꽤 오래된 추억들이지만, 그중에서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지점들이 있기 마련이다. 폴란드의 경우 음식에 대한 기억이 그렇다. 나는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 아니라서 전 세계 어디서든 웬만한 음식은 다 맛있게 먹는 편이지만,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이 세상 모든 음식이 입맛에 맞지는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폴란드식 만두인 피에로기는 짜고 건조했고, 수프는 밍밍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괜찮았던 건 자피에칸카 (zapiekanka)였는데, 이건 피자빵 형태의 오픈샌드위치였으니 정통 폴란드 음식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당시의 나는 결국 현지식을 포기하고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사 먹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크라쿠프에서의 마지막날,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속는 셈 치고 새로운 식당에서 새로운 메뉴를 주문해 보았다. 그게 바로 '비고스'였다. 양배추를 발효시킨 사우어크라우트와 소시지 등을 넣어서 끓인 스튜인데, 한 입 떠먹자마자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걸 느꼈다. 묘하게 부대찌개 맛도 났고 너무 맛있어서, 내가 여행하며 발견한 맛있는 음식들을 적어두는 나만의 명예의 전당 리스트에도 올렸다. 그러니 이번 여행에서 바르샤바에서 딱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면, 그 메뉴는 무조건 비고스여야 했다.
7년 전의 비고스
우리의 착륙 예정 시간은 현지 시간 오후 5시 20분. 그런데 비행기에서 착륙 전에 준다던 두 번째 식사를 아무리 기다려도 주지 않을 때, 나는 딱 한 가지가 걱정되었다.
'아 밥 늦게 주면 바르샤바에서 저녁 맛있게 못 먹는데…'
첫 식사와 간격이 꽤 벌어져 당장 배고픈 것과는 별개로, 바르샤바에서 먹을 유일한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할까 봐, 그리고 내가 몇 년을 기다려 온 비고스를 다시 떠먹는 그 순간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결국 식사는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제공되었다. 너무 배부르지 않게 조금만 먹기로 했지만, 조금만 먹어도 비행기에서는 금방 배가 불렀다.
식사를 마치자 비행기는 서둘러 착륙 준비를 한 뒤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 내렸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하니 6시 30분이었다. 짧은 체류시간 동안 올드타운 야경이라도 실컷 보기 위해 일부러 중심지에 잡아둔 호텔이었다. 미리 찾아둔 식당도 올드타운에 있었다. 하지만 아직 무언가를 먹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으므로, 일단 열심히 걸으며 소화를 시켜보기로 했다. 저녁을 최대한 맛있게 먹기 위해!
바르샤바 잠코비 광장
바르샤바 올드타운은 처음 봤을 때도 반했고, 이번에도 또 반했다. 많은 관광객들은 바르샤바보다는 아우슈비츠 등을 함께 볼 수 있는 크라쿠프로 바로 향하는데, 나는 오히려 한적한 바르샤바가 더 좋다. 저녁이라 하늘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어서 구시가지의 알록달록한 색감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예뻤다.
잠코비 광장을 지키고 있는 분홍색의 바르샤바 왕궁은 묘하게 친근한 구석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부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따스한 색으로 서 있는 왕궁 건물이 반가웠다. 일부 부서진 채로 올드타운을 둥글게 감싸는 바르바칸 성벽, 그리고 구시가 광장 가운데에 당당히 서 있는 인어상도 마찬가지였다. 오래된 모습 그대로 애써 보존되고 있는 곳들이므로 변화가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여전하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기분 좋았다.
물론, 예전에는 본 기억이 없던 걸 새로이 발견하기도 했다.
"이건 뭐야? 예쁘다."
"그러게? 나도 처음 보는데."
놀랍게도 성 요한 대성당은 이전에 본 기억이 없었다. 분명 그 당시에도 있었을 텐데, 오래전이라 기억이 휘발되었던 걸까? 아니면 그때는 낮 풍경만 봐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던 걸까? 오르간 같은 지붕이 이토록 인상적인 건물이 왜 기억에 남지 않았을까. 역시, 한 번 가보는 걸로는 다 알 수 없는 법이었다. 나는 처음 보는 풍경에 오래도록 빠져들었다. 왼쪽의 예수회 교회와 나란히 서 있는 야경의 예쁜 불빛을, 이번에는 잊지 않으려 찬찬히 살펴보았다.
올드타운은 그리 크지 않아서,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둘러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고작 40분 산책에 배가 꺼질 리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고 식사할 시간을 언제까지고 미룰 수도 없는 노릇. 다음날 일찍 출발해야 했기에 일찍 자야 한다는 압박감이 점점 올라왔다.
"밥… 먹을 수 있겠어?"
"음… 먹어야겠지?"
"내일 5시에 나가려면 지금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응, 오늘이 아니면 폴란드 음식 못 먹어볼 수도 있으니까."
정 안 되면 귀국하는 길에 다시 경유하면서 먹어볼 수는 있을 테지만, 이놈의 폴란드 항공이 또 어찌 될지 모른다. 확실하게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은 딱 지금 뿐이었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저녁 바람이 살살 불어 들어오는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을 열어 작게 적힌 영어 글씨들을 살펴보았다. 일단 비고스는 꼭 시켜야 했고, 부모님께서는 폴란드에 처음 오시는 것이니 피에로기도 시켜봐야 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위에 부담이 없을 것 같은 양배추쌈 요리도 함께 주문했다.
"맛있게 드세요."
친절한 서버가 테이블 위에 두고 간 세 가지 요리 중, 나는 피에로기를 먼저 한 점 먹어보았다. 가장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먼저 시도해 본 것이었다.
"어? 나 폴란드에서 먹어 본 피에로기 중에 제일 맛있는데?"
찐 것과 구운 것 중 우리는 군만두 형태의 피에로기를 선택했다. 버섯이 들어간 것 반, 시금치가 들어간 것 반으로 주문했는데, 속도 촉촉하고 알찼지만 만두피가 쫀득해서 더 맛있었다. 사이드로 준 사워크림과의 조화도 완벽했다. 아빠가 맛을 잘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이 식당이 유독 맛있었던 것일까? 7년 전에도 비슷한 메뉴들을 주문했었던 것 같은데, 기억 속 피에로기와는 딴판이었다.
피에로기 덕분에 입맛이 돌아서 양배추쌈도 한 입 잘라먹었다. 양배추 안에 돼지고기와 곡물을 넣어 싼 뒤 토마토소스에 버무린 요리였다. 함께 나온 찐 감자가 맛있었지만 양배추쌈 자체는 담백할 뿐,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빠는 이게 제일 맛있다고 하셨으니,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컨디션이 안 좋아서인지 이날 요리가 전체적으로 맞지 않으셨던 듯하다.)
안타깝게도 비고스는 끝까지 먹지 못했다. 너무 짜기만 해서 실망스러웠다. 대체 그 당시에는 어떻게 부대찌개 맛을 느꼈던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전혀 다른 맛이었다. 짠 장조림을 먹는 기분이었달까. 이번에 먹은 것과 7년 전에 먹었던 것은 확연히 다른 음식이었다. 어쩌면 오래전에 먹었던 건 퓨전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별로일 줄 알았던 피에로기는 가장 특별하게 맛있었고, 가장 기대가 컸던 비고스는 가장 큰 아쉬움을 주었다. 새롭게 도전해 본 양배추쌈은 새로운 시도 자체에 의의가 있었다.
아무런 기대 없이, 아무런 사전 경험 없이 비고스를 주문했다면, 짭조름한 장조림 먹는 맛으로 나름대로 맛있게 먹었을까. 피에로기 역시 맛이 없었다는 강렬한 기억이 없는 상태였다면, 생각보다 평범했을까.
새로운 걸 받아들일 때에도, 우리는 언제나 이미 간직한 선입견을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열린 사고'라고 해도, 문이 활짝 열린 것이지 그 사고를 둘러싼 울타리는 분명 있다. 그 울타리를 넓히려면,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일 자세를 준비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폴란드도 오스트리아도, 한 번 방문했던 곳이라고 해서 자꾸만 예전 여행 기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한 번 가본 것으로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그저 약간의 참고 정도만 될 뿐. 자칫하면 새로운 경험마저 그 좁은 과거의 경험 속에 가두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은 예전 여행과 다를 것이었다. 이미 7년 전 경험했던 햇살 속의 빈은 없었고, 앞으로 무얼 경험하게 될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바르샤바에서 걸었던 거리에서도 새로운 것들을 발견했듯, 같은 요리에서도 새로운 맛을 발견했듯, 그때와 지금의 모든 것은 제각각일 것이다. 어떤 건 좋고, 또 어떤 건 아쉬울 테지.
어느 쪽이든 이전의 경험에 연연하지 않고, 처음 경험하는 사람처럼 마음의 울타리를 넓혀보기로 했다. 어떤 일이든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