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에서의 밤, 나는 매 시간마다 잠에서 깼다. 평소 시차 적응을 못하는 편은 아닌데, 신경 쓰이는 것들이 많아서인지 깊이 잠들지 못했던 것 같다. 빈에 폭우가 오고 있다던데 비행기가 제대로 출발해서 도착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고, 빈에 도착해서 여행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오스트리아 철도 회사로부터 답변을 받지 못해 빈 이후의 일정들도 차례차례 신경이 쓰였다.
'걱정하지 말자, 잘 될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려는 행위 그 자체마저도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으면서도 부모님과 함께 하는 여행인 만큼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에서 '불안이'가 일꾼들을 시켜 다음날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부정적인 시나리오들을 밤새 그리도록 했던 장면이 생각났다. 내 불안이도 열심히 일꾼들을 지휘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선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다, 새벽 4시가 되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과 상관없이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풀어둔 하룻밤어치 짐을 다시 챙기면서 텔레비전을 켜보니, 동유럽 전체적으로 비가 많이 왔다는 뉴스가 계속되고 있었다. 기온이 낮아져서 일부 고지대에는 심지어 눈까지 내렸다고 했다. 9월에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럽 여행 커뮤니티들에는 현재 동유럽 내 열차들이 취소 및 지연되었다는 소식과 사연들이 연이어 올라왔다. 나는 아직 관련해서 받은 연락은 없었지만, 빈 공항은 괜찮을지, 며칠 후 문제없이 기차를 타고 인스브루크에 갈 수 있을지, 눈뜨자마자 걱정이 또 이어졌다.
새벽의 바르샤바
다행히 바르샤바는 아직 이슬비 정도 내리고 있었다. 오전 5시에 택시를 타고 13분 만에 도착한 공항은 (20분 거리인데 기사가 너무 빨리 달려서 목적지가 공항이 아니라 저승인 줄 알았다) 그 시간에도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손등을 붓 같은 것으로 쓸어서 폭발물의 흔적까지 확인하는 까다로운 짐 검사를 마치고, 라운지에서 아침을 먹은 뒤 보딩 시간에 맞추어 탑승구로 향했다.
6시 55분이었던 보딩은 은근슬쩍 7시 5분으로 늦춰지더니 (역시 Late or Tomorrow), 7시에는 갑자기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기내에 들고 탑승할 캐리어는 무게를 달아주세요."
진작 안내되었어야 하는 사항을 보딩 직전에 알려주다니. 일부러 탑승시간을 지연하고 있는 것 같다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었다. 우리에게도 작은 기내용 캐리어가 하나 있어서 카운터에서 체크인하면서 확인을 했었는데, 당시 직원은 별말이 없었다. 어쨌든 안내대로 무게를 재는 줄에 가서 선 뒤 확인을 받고는 탑승 대기 줄로 되돌아갔다.
공항 창밖으로는 우리가 타게 될 비행기가 보였다. 바르샤바에서 빈까지는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서 비행기는 국내선 정도의 규모였지만 만석이라 그런지 사람이 꽤 많았다. 어느새 탑승 줄은 길게 늘어섰다. 이미 7시 5분은 진작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 그렇지.'
우리는 28번 게이트에 서 있었고, 바로 옆에는 27번 게이트가 붙어 있었다. 두 게이트 입구 위에는 각각의 목적지와 출발시간을 표시한 화면이 나란히 있었다. 27번 게이트 화면에는 리투아니아 빌뉴스가 적혀 있었다. 발트 3 국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기에 다음 여행을 상상해 보며 '빌뉴스'라는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곳에서 '빌뉴스'가 사라지고 '빈'이 생겼다. 잘못 봤나 싶었지만, 반대로 우리가 서서 대기하고 있던 28번 게이트 화면은 '빌뉴스'로 바뀌어 있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방송이 나왔다.
"빈으로 가는 승객 분들은 27번 게이트로 가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황당해하며 반대편으로 이동해 다시 줄을 섰다. 이렇게 막판에 게이트가 바뀌는 건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말도 없이 화면 속 보딩타임은 어느새 7시 40분으로 바뀌어있었는데, 창밖을 내다보니 이쪽에는 비행기가 없었다. 원래 타려던 비행기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것일까. 아무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우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바르샤바 공항
게이트를 통과해 밖으로 나가 비행기까지 데려다줄 버스에 올랐다. 한 손에는 기내용 캐리어를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는데, 갑자기 폴란드 항공에서 이메일이 날아왔다. 출발시간이 8시로 바뀌었다는 메일이었다. 참 빠르기도 하지.
비행기에 올라타고 나니 또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그건 바로 '짐이 제대로 잘 실려갈 것인가'였다. 온라인에서 봤던 수없이 많은 폴란드 항공 후기글들이 떠올랐다. '환승할 때 짐이 따라오지 못한 사연', '짐을 잃어버린 사연', '짐이 어디선가 사라졌는데 3일이 지나서야 겨우 받은 사연'… 지금 우리의 상황상 비행기가 뒤늦게 바뀐 것 같았는데, 기존 비행기에 실려있던 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내려서 이 비행기로 다시 실었을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어느새 변경된 출발 시간인 8시 마저도 넘었다. 'We are waiting for final documents'라는 방송만 시간 차를 두고 두 차례 흘러나왔다. 아마 비행기가 바뀌었으니 서류상 추가적으로 정리할 것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역시나 사과도 설명도 없었다.
불평도 잠시, 밤잠을 설친 나는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한 채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곧 어수선한 소리에 깼다. 부모님께 여쭈어보니 내 자리 근처에 앉아있던 한 승객이 내려달라고 해서 내렸다고 했다. 여기까지 다 와서 왜 내렸을까?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왠지 찜찜했다.
"승객 한 분이 내리셔서 짐 확인 좀 하겠습니다. 이 가방 어느 분 건가요?"
승무원이 오더니 내린 승객 자리 주변의 짐칸을 모두 열어, 각 짐들의 주인을 확인했다. 혹여 수상한 짐을 두고 내렸을까 봐 확인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테러의 위험에 대비해서이리라.
'그렇지만, 공범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자살 테러도 얼마나 많은데.'
영화를 많이 본 탓이 아니라 뉴스를 많이 본 탓이었다. 남겨진 짐은 모두 주인이 확인되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머릿속에는 테러의 걱정까지 차올라 용량이 초과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안 그래도 평소에 겁이 많은 사람에게 이런 불안까지 생기다니. 눈을 질끈 감고 애써 잠을 청했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다행히 비행기는 별일 없이 빈에 착륙했다. 예정시간보다 1시간 이상 지연되었고 비가 상당히 많이 오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무사히 도착한 것에 의의를 두었다. 이제 남은 한 가지 걱정에 대한 답을 확인할 차례였다. 과연 우리 짐은 잘 따라왔을까.
함께 내린 무리를 따라 수하물 찾는 공간으로 향했다. 짐은 2번 벨트로 들어온다고 했다. 같이 타고 온 얼굴들이 주변에 보여서 그 근처에 같이 섰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짐이 나오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 자리 가까이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모두 짐이 안 나온 것인지 빈손으로 서 있었다. 짐이 정말 안 온 것인가 슬슬 불안해질 무렵,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돌아가던 벨트가 멈춰 섰다. 우리뿐 아니라 같이 타고 온 사람들 모두 당황하며 웅성거렸다.
"어? 우리 짐!!"
그런데 다시 주변을 보니 우리가 서 있던 쪽은 3번 벨트였다. 뒤를 돌아 2번 벨트를 보니 우리 짐은 얌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먼저 헷갈린 것인지, 같이 타고 온 사람들도 모두 2번으로 뒤늦게 달려와, 황당함에 같이 웃었다.
빈 공항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건 전혀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니 내내 불안했고, 결국 그 최악의 가능성이 현실화가 되었다고 곧장 생각해 버리게 되었다. 잃어버리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꼭 그렇게 내내 마음을 졸여야 했을까. 어차피 같은 결과까지 가는 길을 일부러 더 괴롭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일어날 일들은 어떻게든 일어난다. 불운이 우리가 무얼 잘못해서 벌을 받는 일이 아니듯, 행운 역시 무얼 대단히 잘해서 상을 받는 일 또한 아니다. 일련의 사건들은 어떠한 의도 없이 벌어지고, 그걸 행운과 불운으로 받아들이는 건 그 순간 우리의 입장 차이일 뿐이다.
비가 쏟아지는 빈의 시내로 나가는 길, 불안한 예감 같은 건 다 지워버리고 지금까지의 행운을 찾아보기로 했다. 인천에서 1시간 이상 늦게 출발했지만 바르샤바에는 제시간에 가깝게 도착해 바르샤바 올드타운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 하룻밤 짧게 머문 바르샤바에서 비 오기 전 풍경을 볼 수 있었다는 것. 바르샤바 역시 우리가 떠난 뒤 폭우가 내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비가 오지 않는 바르샤바에 운 좋게 잘 도착했던 것이다.
생사의 문제가 아니라면, 나중에 걱정해도 늦지 않다. 지금 당장 벌어진 일들에만 집중하면 된다. 자칫하다가는 행운마저 충분히 즐기지 못한 채 불안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