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전부터 너무 많은 변수들에 걱정하는 내게 부모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두 분 다 여행 경험이 많고, 엄마는 심지어 나와 남미 여행까지 함께 하면서 못지않은 변수를 많이 경험해 보았으니 정말 괜찮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딸의 마음은 그리 쉽게 놓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부모님 두 분 모두와 함께 하는 여행인 만큼 웬만하면 모든 걸 수월하게 할 수 있었으면 했다. 부모님은 체력도 시차 적응도 나보다 쉽지 않으실 텐데, 막상 닥치면 당황하고 힘들어하시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혼자라면 정말 그때 그때 되는 대로 하면 되지만 함께 할 때는 그런 결정이 쉽지 않을 것도 같았다.
안 그래도 매번 꼼꼼하게 세우는 여행 계획이지만, 이번에는 더욱더 신경을 많이 썼다. 출발 전까지 몇 번이고 고쳤다. 비가 세차게 온다고 하니 너무 오래 밖을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 부분도 반영했고, 비행기나 기차가 늦어질 가능성도 고려해 최대한 여유롭게 세우려 했다.
그리고 역시나, 바르샤바에서 빈으로 가는 비행기가 1시간 넘게 지연되는 바람에 본격적인 시작 전부터 계획표가 수정되었다.
"일단 오늘 첫 일정은 점심식사, 그다음은 벨베데레!"
"네~"
호텔에 짐을 맡겨두고 본격적으로 빈 시내로 나섰다. 나는 가이드처럼 부모님을 이끌었고, 부모님은 내 뒤를 가깝게 잘 따라오셨다.
"아우, 그런데 왜 이렇게 추워?"
트램과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있는 대로 껴입었음에도 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었다. 비만 생각했지 추위는 계산에 없던 일이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들고는 온몸을 감싸며, 벨베데레 근처 식당에 도착했다. 오래전에 맛있게 식사했던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추위에 떨다 들어와서인지, 가장 먼저 눈에 띈 메뉴는 역시 갈릭수프였다. 뜨끈한 수프로 먼저 몸을 녹인 뒤, 본격적으로 오스트리아 첫 식사를 시작했다. 구운 치즈가 얹어진 샐러드, 족발 같은 요리인 슈텔체, 그리고 립 요리를 번갈아가며 맛보았다. 립은 기억했던 것보다는 평범한 맛이었지만, 슈텔체는 껍질이 쫄깃거려 맛있었고 샐러드에 함께 나온 구운 치즈도 정말 맛있었다. 전체적으로 다소 짜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양조장도 겸하고 있는 식당인 만큼 맥주 테이스터도 주문했는데, 다섯 가지 종류의 맥주 맛을 번갈아가며 보며 짠맛을 중화시켜 보았다.
식사를 하니 몸이 조금 데워졌다. 다시 비장한 마음으로, 식당 바로 옆의 벨베데레 궁전으로 향했다. 오래전에는 궁전이었지만 이제는 미술관으로 쓰이는 벨베데레는 상궁과 하궁으로 나뉜다. 나는 예전에도 이번에도 상궁에만 들어갔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클림트의 <키스>가 상궁에 있기 때문이다.
궁전 입구로 가기 위해서는 궁전 앞 정원을 지나가야 했다. 건물이 없고 나무들만 드문드문 있어서인지 바람이 엄청 불었다. 우산과 머리카락은 물론, 사람까지도 이리저리 밀고 끌었다. 우산은 계속해서 뒤집혔는데, 바람에 맞서 다시 원상복구를 시켜놓아도 금세 다시 뒤집혔다. 빈에 있는 동안은 사실 폭우보다도 바람 때문에 괴로웠다. 바람에 저항하는 일이 여간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단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따뜻할 거라는 생각으로 추운 바람을 견뎌내며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티켓을 소지한 사람들이 입장하는 줄이 꽤나 길었다. 일단 부모님께 이쪽에서 바람을 피해 서 있으라고 하고, 나는 도망가려는 우산을 꼭 잡고 매표소로 향했다. 그곳 줄도 길어서 건물 밖까지 이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지는 시야는 포기한 채 양손으로 우산을 붙들고 줄을 섰다.
빈을 여행할 때는 궁전도, 미술관도, 식당도, 대부분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날은 우리가 오스트리아에 도착하는 첫날이었고, 비행기가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어서 미리 예약하지 않았다. 9월이면 여름 성수기는 살짝 지난 시점일 거라는 기대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드디어 매표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차례가 된 순간, 눈앞의 큰 화면에 칸칸이 적힌 대부분의 입장 시간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판매가 온라인과 연동되어 많이들 실시간으로 모바일 입장권을 구입하는 듯했다. 가장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두 시간 후였다. 식당에서라도 온라인으로 티켓 상황을 볼 걸, 뒤늦게 후회했다.
날이 좋다면 미련 없이 곧장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되지만, 이 날씨에 어찌해야 할지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그나마 벨베데레 궁전에 들어가서 추위와 바람을 좀 피해보려고 했는데, 입장이 불가하다니. 일단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어떡하지, 지금 당장 들어갈 수 있는 표가 없어. 가장 빠른 게 두 시간 후야."
"그러면 그냥 옷부터 사러 갈까?"
"아, 그래! 그러면 되겠다."
만약 혼자 여행 중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잘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옷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두 시간 후 티켓을 우선 사놓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다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날은 부모님의 빠른 제안으로 곧장 따뜻한 옷을 사러 갔다. 다행히 벨베데레 궁전에서 트램 한 번이면 중심지로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가장 먼저 눈에 띈 가게로 들어갔다. 3층짜리 건물 어딘가에는 우리가 살 만한 게 있을 거라고 믿었다.
처음에는 두툼한 카디건, 늦가을 재킷 등을 보다가,
"아예 이런 건 어때?"
엄마가 짧은 패딩을 들고 왔다.
"어차피 인스브루크까지 갈 건데, 아예 패딩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거긴 빈보다 더 추울 거잖아."
"응 그러게, 패딩이 낫겠다."
어차피 비가 오고 있었으므로 패딩이 나을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엄마가 골라온 것이 나름 인기 아이템이었다. 각 국의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패딩을 대보고 입어보고 있었다. 다 같은 마음으로 이곳에 왔을 거라고 생각하니 동지애가 느껴졌다.
엄마랑 나는 두꺼운 패딩, 아빠는 상대적으로 얇은 패딩으로 하나씩 골라서 결제했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조금 당당해진 기분이었다. 이젠 어디를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벨베데레 다시 가볼까? 지금은 티켓이 있나?"
옷을 산 뒤에는 근처 관광지에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더 현명한 제안을 했다. 벨베데레 궁전은 위치상 다음날 다시 가기도 다소 애매했기 때문이다.
얼른 온라인 티켓 판매처에 들어가 보니, 다행히도 아까 끊지 않았던 티켓이 남아있었다. 아까는 2시간 후였던 것이, 패딩을 사고 나니 어느새 30분 후가 되었다. 휴대폰으로 얼른 예약을 하고, 다시 트램에 올랐다. 이번에는 패딩을 입어 따뜻한 채로, 입장 줄이 조금 길어도 몸과 마음의 여유를 찾은 채로 입장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벨베데레에서 클림트의 <키스>를 봤던 것, 그리고 화려한 마블홀을 봤던 것 정도만 기억이 나는데, 다시 방문하니 좋은 작품이 참 많았다. 힘겹게 들어왔기 때문에 더 열심히 들여다봐서일까. 클림트의 작품들 중에도 <카머성의 공원 길> 등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왔고, 모네의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 정원의 거리>도 인상적이었으며, 조각 작품들도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하루에 두 번이나 방문을 하며, 추위에 떨고 우산을 붙들고 힘겹게 오간 벨베데레의 기억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게 된 것 같다.
사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거라 웬만한 것들은 미리 예약하는 것이 옳았을 텐데, 이날처럼 비행 사정상 어찌 될지 모르는 건 미리 할 수가 없었다. 날이라도 좋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생각보다 심한 폭우와 강한 바람에 꽤 고생스러운 하루였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는 두꺼운 옷도 사고 벨베데레도 봤으니 이날 해야 했던 일들은 모두 해냈다. 내가 세운 계획, 내가 미리 했던 걱정들 덕분이 아니었다. 내가 매표소 앞에서 뒤집어진 우산조차 어찌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부모님이 재빨리 내게 대안을 제시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 가장 쉽다고 생각했다. 나 혼자 있어야 결정도 더 빠르고 타협도 더 빠르다고. 그렇지만 빠른 게 반드시 가장 좋은 선택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함께 하는 여행이 더 똑똑할 수 있었다.
많은 가족여행이 힘든 건 어릴 때는 부모가, 커서는 자식이 일방적으로 이끌고 다니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주도하는 사람은 부담스러운 짐을 지게 되고, 따라가는 사람은 자신이 계획한 여행이 아니니 지친다. 주도하는 사람은 가이드가 아니고, 따라가는 사람은 손님이 아니다. 언제나 '함께 하는 여행'이어야 한다.
나는 어릴 때 그런 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그런 부모님과 함께 여행하고 있었다. 비록 내가 미리 준 일정표를 내 기대만큼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으셨지만… 비바람 속에서 길을 잃을 때에도,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에도, 음식이 별로 맛이 없을 때에도, 한 번도 불평하지 않으시는, 그런 부모님과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