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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Nov 14. 2024

망가진 우산, 터진 요플레, 그리고 바람, 비, 바람

여행이고 뭐고

벨베데레 궁전에서 비바람 폭격을 맞고 난 뒤, 기운 충전이 필요했다. 일단 호텔로 돌아가서 체크인을 하고 잠시라도 쉬기로 했다. 그전에, 마실 물도 필요하고 다음날 먹을 아침거리도 필요했으므로 마트에 들러 간단히 장을 보기로 했다. 구글맵을 검색해 벨베데레 근처의 마트를 하나 발견했다.


 정도 거리는 멀지 않겠지 했는데, 궂은 날씨 속에서는 거리가 가까워도 멀었다. 비는 빈틈없이 계속 내렸고, 도망치려 애써도 바람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비만 오는 건 어떻게 해보겠는데, 바람까지 오는 건 정말 너무 힘든 일이었다. 바람의 저항에 맞서 걷는 일은 초 단위로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 비만 오든가 바람만 오든가,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이전에 호주와 캐나다에서 어마어마한 초강력 바람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꽤 오래 전임에도 당시의 내게는 충격적인 수준이었기에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두 곳 모두 길을 걷다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휘청거리며 인도를 벗어나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는 적당히 센 바람이 이어지다 그토록 거센 바람이 한두 번씩 세차게 밀려드는 정도였다.


빈에서 우리가 겪은 바람은, 그런 간헐적인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한 쉴 틈 없이 내리 겪어야 하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거리에서 그냥 찍은 사진이 없다. 휴대폰은 오직 길을 찾아야 할 때 어쩔 수 없이 쓸 뿐, 사진을 위해 휴대폰을 꺼내거나 걸음을 멈출 힘은 없었다.



결국 마트로 가는 길에 우산이 한 개 망가졌다. 몇 년 전부터 비 올 때마다 들고 다녔던 우산인데, 오스트리아 바람을 몇 십분 맞고는 우산살들이 제멋대로 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서 트램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다른 우산도 또 하나 망가졌다. 이번에는 우산살이 뚝 부러져버렸다. 세 개 중 두 개가 망가졌으니, 저녁부터는 우산 대신 우비를 써야 했다. 우산을 새로 산다 해도, 이 바람을 버틸 수는 없을 테니까. 망가진 우산을 어떻게든 펼쳐보고 있을 무렵, 트램이 정류장에 도착했다.


"어디서 시큼한 냄새나지 않아?"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다들 비 맞고 타서 그런가?"


장바구니를 메고 트램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빠가 물었다. 나는 아빠와 함께 주위를 둘러봤지만 딱히 시큼한 냄새가 날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아빠는 장바구니 안쪽을 들여다보셨다.


"아, 요플레가 터졌네!"


우리 아빠는 장바구니 담기의 달인이다. 장 볼 때마다 나도 엄마도 장바구니는 건들지 않는다. 계산대에서 바코드가 찍혀 슬라이딩되자마자 물건을 잡아 차곡차곡 계획적으로 쌓아 넣으시는 능력자다.


그런데 이날은 마음이 급했던 탓인지 충분히 신경을 쓰지 못하셨나 보다. 계산대에는 우리 뒤로 줄이 꽤 길게 서 있었는데, 결제하는 것도 장바구니를 구입하는 것도 시간이 꽤나 걸려서 살짝 눈치가 보였다. 서둘러서 짐을 챙기느라 방심한 틈에 요플레 위에 무언가 무거운 것이 올라갔던 모양이다.


호텔 체크인 후 방에 들어서자마자 장바구니에서 짐을 다 꺼내 요플레 범벅이 된 과일과 다른 패키지들을 잘 닦아냈다.


"어? 이거 뭐야."


장바구니에서 꺼낸 큰 페트병 두 개가 모두 생수가 아니라 탄산수였다. 부모님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셨다. 내가 다른 걸 고르는 동안 부모님께서 의심 없이 들고 오신 것이었는데… 유럽에는 생수 종류도 다양하다는 사실을, 순간 놓쳐버리고 말다.


"이거 뚜껑 열어두면 탄산이 좀 날아갈까?"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게다가 내내 열어둘 수도 없는 노릇. 호텔 방에는 커피포트도 없어서 물을 끓여보지도 못했다. 나는 탄산수여도 괜찮은데, 아빠는 약 마저 탄산수에 드셔야 했다.



"저녁… 안 먹지?"

"그냥 과일이나 먹자."


호텔에 들어오니까 모두가 기진맥진해져서 아무 데도 다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도 식사에 대한 욕구도 없었고, 먹으러 갈 힘도 없었다. 대신 마트에서 사 온 과일을 먹었다. 다행히 납작 복숭아와 토마토와 보랏빛 플럼 자두 모두 맛있었다. 납작 복숭아는 그동안 백도 같은 것만 먹어봤었는데, 천도복숭아 같은 건 여기서 처음 먹어보았다. 시원하고 달콤한 과일을 베어 먹으니 기운을 좀 차릴 수 있었지만, 여전히 밖으로 나갈 의지까지는 주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일정은 하나 더 남아있었다. 바로 저녁 8시 30분에 시작하는 쉔부른 궁전 콘서트. 예전에 빈을 여행했을 때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이후 모차르트의 음악에 빠지게 되면서 이번 여행에서는 꼭 콘서트를 한 번 보고 싶었다. 선선한 9월의 날씨에, 깔끔한 옷을 입고 예쁜 쉔부른 공원을 산책하며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말이지. 비바람 속에서 젖은 옷을 말리며 듣는 음악이 될 것이었다. 호텔 방 창밖으로는 매서운 바람소리가 들렸다.


"한국이었으면 안 나갈 텐데, 그치?"

"집에만 숨어 있을 날씨지."

"아마 이런 날은 회사에서도 재택 하라고 했을 거야."


실제로 동유럽에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이 집을 잃은 폭풍 보리스였다.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 날씨면 우리나라 사람들 아무도 안 나오겠지. 하지만 우리나라에 관광 온 외국인들은 밖에 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오스트리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빈에서 우산과 사투를 벌이고 우비를 꼭 끌어안는 전 세계 관광객들을 다 마주친 것처럼.


과일을 먹고, 잠깐 눈 좀 붙이고, 결연한 마음으로 콘서트를 보러 나갔다. 예쁜 옷은 개뿔, 방수를 위해 인스브루크에서 신으려고 들고 온 트레킹화를 신고 나갔다.



쉔부른 콘서트는 주로 별관 같은 '오랑주리' 건물에서 한다. 오래전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대결을 펼쳤던 공간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다. (당시에는 살리에리가 이겼지만, 지금은 모차르트와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연주다)


하지만 가끔은 다른 장소에서 하는데, 이날도 그런 날이었다. 이날은 쉔부른 궁전 메인 건물의 메인 홀인 '그레이트 갤러리'에서 공연을 했다. 그러나 예매한 티켓 정보에는 매표소가 여전히 오랑주리로 표기되어 있기에, 일단은 오랑주리로 가서 티켓을 찾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갔다. 그레이트 갤러리면 숙소에서 트램 한 번으로 갈 수 있지만, 오랑주리는 메인 궁전 건물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서 지하철을 갈아타야 했다.


그런데 비바람을 뚫고 도착한 오랑주리 건물은, 내부에 불은 켜져 있었지만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어둠 속에서 몇 개의 문 앞에서 헤맨 뒤에야 표지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레이트 갤러리에서 공연을 합니다. 그쪽으로 오세요.'


아니 그럼 설명을 그렇게 안 해줬어… 매표소에서 티켓 찾아야 한다며… 오랑주리가 매표소라며!!


짜증을 냈지만 내 목소리는 빗소리에 다 묻혀버렸다. 짜증을 내면 무얼 하나. 콘서트 보려면 걸어야지.


처음부터 그레이트 갤러리로 갔다면 트램 한 번 타고 200m 정도 걸어가면 되는데, 그 거리조차도 나중에 공연 종료 후 호텔로 돌아갈 때 바람 때문에 힘들었는데, 오랑주리에서 그레이트 갤러리까지는 500m 떨어져 있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것 하나 없는 길을 계속 걸어야 했다. 시야를 막는 머리카락은 치워가며, 자꾸만 벗겨지려는 우비 모자는 붙잡으며.


"진짜 빈 우리한테 왜 이래!!"



영어에 'Don’t take it personally.'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자면 '개인적인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는 뜻인데, '너'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니 기분 나빠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비, 바람, 망가진 우산, 터진 요플레, 다시 비, 바람…


이 모든 걸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날씨가 무슨 잘못인가. 빈이 무슨 잘못인가.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 당장의 짜증은 어찌할 수 없다. 그냥 마음껏 욕해버리기로 했다.


에잇, 이 그지 같은 날씨야!



* 이번 주부터 연재일을 목요일 1회로 변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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