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올드타운 시내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쉔부른 궁전은 화려한 궁전만큼이나 예쁜 정원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첫날 저녁 콘서트를 보기 위해 한 번, 그리고 다음날 아침 궁전 내부와 정원을 보기 위해 두 번 갔다. 하루에 다 할 수도 있었지만, 가급적 아침 일찍 가는 것이 인파가 덜하기에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빈에서의 숙소도 쉔부른 근처로 잡은 것이었는데… 날씨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하루에 몰았을 것이다.
아무튼, 7년 전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던 궁전 내부를 무료 오디오가이드의 도움으로 그 화려함과 소박함을 모두 둘러본 뒤, 곧장 정원을 구경하러 나갔다. 사실 이 날씨에 예쁠 리는 만무했지만, 이틀 연속 방문했는데 공원 코빼기도 안 보는 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사람들로 가득 찼을 정원이지만,이날은 텅 비어있었다. 이른 시간에도 관광객들이 북적거리던 내부에 비하면 초라했다. 무늬를 이루며 예쁘게 심어져 있는 꽃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좌측 : 2017년의 정원 / 우측 : 이번에 찍은 사진
궁전 바로 앞에서 보는 정원도 좋지만, 정원의 반대편 언덕에 있는 건축물인 글로리에테에서 내려다보는 궁전과 시내의 풍경도 예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껏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했다. 7년 전에는 너무 더워서 걷지 못했고, 이번에는 힘겹게 비바람을 뚫고 걸어갔음에도 폭우 때문인지 올라가는 길이 닫혀 있어서 가지 못했다.
제대로 보고 싶어서 이틀에 걸쳐 계획한 쉔부른 일정이었는데, 결국 이번에도 정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세 번째 방문하게 되는 날에는 글로리에테까지 가볼 수 있으려나. 추위를 뚫고 정원 끝까지 가로질렀는데 오르기를 시도조차 해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물론 이 정도 폭풍우에는 길이 위험할 수 있으니 막아두는 게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이 정도의 날씨는 정말이지, '이불 밖은 위험한' 그런 날씨였으니까.
하지만 여행자들은 이불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추우나 더우나, 관광을 하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야 한다.
이 날씨의 여행자들은 일단 우비를 사야 했다. 망가진 우산을 지금 대체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지금은 우산을 새로 사도 금방 또 망가질 것이다. 우비도 찢어지는 마당이니.
우리는 쉔부른에서 나와 우비를 더 사러 갔다. 오래 들고 다녔지만 사실 쓴 적은 거의 없는 우비들이었는데, 하루 사이에 혹사했는지 아빠가 입던 게 찢어졌다. 쇼핑몰에 가는 김에 겸사겸사 따뜻한 옷도 좀 더 사기로 했다.
그런데 의외로 쇼핑몰에 우비를 파는 곳이 없었다. 고민 끝에 일회용 수준으로 보이는 판초형 반투명 우비를 급한 대로 하나 샀다. 나중에 쇼핑몰 문을 나서기 직전에 좀 더 튼튼해 보이는 우비를 뒤늦게 발견해서 하나 더 사긴 했는데, 아빠는 일단 먼저 산 것부터 한 번 입어보겠다고 하셨다.
"아빠, 미안한데."
"응?"
"아빠 지금 되게… 쓰레기봉투 뒤집어쓴 것 같아."
"야, 쓰레기봉투 쓰고 있으면 아빠는 쓰레기야? 아빠한테 쓰레기라니!"
"아니 우비가 그렇다고!"
우리는 셋이 비를 맞으면서 미친 사람들처럼 배가 찢어지게 웃었다. 내가 사진을 찍어서 보여드렸더니 아빠는 더 크게 웃음이 터지셨다. 사진은 아빠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하반신만 잘랐다. 이 브런치북의 표지사진 속 내 모습을, 팔 없는 판초형으로 상상해 보시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왼쪽이 아빠의 하반신
우리는 한바탕 크게 웃고, 각자 쓰레기봉투를 하나씩 뒤집어쓴 채 올드타운 중심가로 나갔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웃음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잠시 후 우리는 재난영화 속 엑스트라 1, 2, 3이 되고 말았다. 주인공이 되기에는 그만한 체력도 없었다. 그냥 영화 구석 어딘가에서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제 갈길 가는 것조차 힘겨운 엑스트라였다.
엑스트라들이 믿을 곳은 우비뿐이었는데, 그 우비조차 비로부터 완전한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했다. 비는 어떻게든 파고들었다. 바지와 양말 속으로, 우비 속으로. 길을 찾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봐야 했는데, 우산 대신 우비를 쓰고 있으니 휴대폰은 아무런 보호막 없이 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활방수가 된다지만, 이 정도의 폭우도 생활방수 수준에 들어가는지 확신이 안 섰다.
'… 여행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다.'
방수를 위해 하루종일 트레킹화를 신으니 발도 너무 아팠다. 인스브루크에서 산에 오를 때를 대비해 들고 온 트레킹화였는데, 빈에서 이렇게 신게 될 줄은 몰랐다. 하루종일 신으라고 만들어진 신발은 아니기에, 발을 조이는 트레킹화는 매우 불편했다. 밤에 잠이 들 때 발이 뻐근하고 발가락이 저릴 정도였다. 편안한 일반 운동화는 금세 흠뻑 젖어버리니 신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트레킹화가 있었으니 발에 동상 걸리는 일 정도는 막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긴 하다. 양말을 타고 들어오는 빗물들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지만.
불편한 신발을 신고, 우비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모자를 붙들고, 눈앞의 빗줄기와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시야를 확보하고, 휴대폰 화면 위에 가득 찬 빗방울을 닦아내며,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일. 그건 대단히 귀찮고 힘든 일이었다. 바닥난 체력과 아파오는 발,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쌓이고 쌓여, 오전의 유쾌한 웃음들은 어느새 다 사라지고 예민함만이 남았다.
"여긴 뭐야? 예쁘다."
"아 몰라, 직접 찾아봐."
부모님께서는 그저 신기하고 예뻐서 감탄사처럼 하시는 말씀을, 나는 자꾸 나에게 물어보는 걸로 느껴지니 짜증이 났다. 길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내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난 것이다. 그냥 나중에 찾아보자, 정도로만 해도 되었을 텐데.
빗줄기가 마치 바늘처럼 떨어지는 날이었다. 내 감정도 그렇게 뾰족해지던, 아마 부모님도 크게 내색하진 않으셨지만 못지않게 뾰족하셨을, 그런 날이었다.
버려진 우산들
어쩌면 남들도 그랬을지 모른다. 평소 1시간 넘게 줄을 선다던 유명 소시지 가판대에서 1분의 기다림조차 없이 '비엔나소시지'를 사 먹은 뒤, 종이와 휴지를 버리기 위해 다가간 쓰레기통에는 우산만 가득 차 있었다.
그러고 나서 보니 거리 곳곳에 우산들이 버려져 있었다. 어떤 우산들은 곱게 접힌 채로, 어떤 우산은 부러진 우산살이 그대로 드러난 채로. 어떤 우산은 작은 쓰레기통 안에 욱여넣어지기도 했고, 어떤 우산은 그냥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기도 했다.
우산을 버렸을 주인들을 상상해 보았다. 누군가는 웃으면서 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당황하면서, 혹은 심지어 욕하면서 버리지 않았을까. 어느 쪽이든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인생이란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퍼붓는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비비안 그린
여행도 그 자체로 인생이며 모험이다. 나는 기꺼이 빗속에서 춤을 출 것이다.
내가 2년 전 출간했던 세계여행 에세이 <그렇게 풍경이고 싶었다>에 담았던 글의 일부다. 아일랜드 모허 절벽의 흐린 하늘을 떠올리며,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앞 빗줄기를 추억하며, 당시에는 진심으로 썼던 글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나는, 그 당시의 나에게 콧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흥, 춤도 바람이 안 불어야 출 수 있는 거지.'
눈 속으로까지 들어오는 빗방울을 속눈썹으로 힘겹게 밀어내야 하는 폭풍우 속에서, 춤이 가당키나 한가. 비가 낭만일 수 있는 건, 손톱만큼의 여유라도 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이럴 때마저 춤을 출 필요는 없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안 통할 때가 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자체를 잘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때가 있다.
기다림 없이 맛있는 소시지를 사 먹을 수 있었던 것,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쓴 것 같았던 아빠의 모습을 보며 한바탕 웃었던 것. 그런 작은 순간들에 대해 '그래도 이런 건 좋았어' 정도의 생각을 하며, 춤은 나중을 위해 적립해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