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을 맞으며 소진된 체력을 충전하기 위해, 빈 3대 카페 중 하나인 카페 데멜로 향했다. 달달한 음식만큼 가성비 좋은 에너지도 없다. 3대 카페 모두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데멜은 아예 예약을 받지 않는 곳이라서 모두가 평등하게 기다릴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자리가 빨리 나는 편이라 우리도 대기 20분 만에 들어간 것 같다.
오스트리아 전통 팬케익 디저트인 카이저슈마렌 (Kaiserschmarrn)과 커스터드 안에 잼이 들어간 듀카텐부흐텐 (Dukatenbuchteln), 그리고 초콜릿 케이크인 자허 토르테 (Sachertorte)를 하나씩 주문했고, '비엔나커피'도 종류별로 주문했다. 사실 '비엔나커피'는 곧 아인슈페너인 줄 알았는데, 막상 알아보니 비엔나식 커피는 생각 외로 종류가 다양했다.
독일어를 배워본 적이 없으니 각 메뉴의 발음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메뉴판을 들어 손가락으로 메뉴를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최대한 아는 대로 발음했는데, 말할 때마다 서버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라고 했다. 청력이 좋지 않은 건지 시력이 좋지 않은 건지 그냥 마음이 좋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므로 무시하고 더 큰 목소리로, 손가락으로 탁 소리가 나게 메뉴판을 가리키며 주문했다.
좌: 자허토르테, 커피 / 우상단: 카이저슈마렌 /우하단: 듀카텐부흐텐
촉촉한 카이저슈마렌은 함께 나온 달달한 자두 콩포트를 곁들여 먹으니 더 맛있었고, 듀카텐부흐텐은 안에 살구잼과 자두잼이 들어있었는데 바닐라 소스까지 찍어먹으니 더 환상적이었다. 자허 토르테는 예상했던 초콜릿 케이크 맛이었지만 달지 않은 휘핑크림과 함께 먹으니 더 좋았다. 디저트는 달았지만 커피는 달지 않았다. 아인슈페너 (Einspänner) 외에 카페 라떼 같은 멜란지 (Melange), 그리고 멜란지에 휘핑크림과 초코 스프링클이 올려진 프란치스카너 (Franziskaner)도 맛보았다. 아인슈페너만큼은 달 줄 알았는데 세 커피 모두 달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디저트와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배를 좀 채우고 나서는 빈 미술사박물관과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에 갔다. 그나마 다른 도시가 아닌 빈에서 이토록 많은 비를 만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쉔부른과 벨베데레의 정원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실내 관광이었기 때문이다. 인스브루크와 잘츠부르크에서는 산과 호수를 구경해야 했으니, 차라리 빈에서 이런 폭격을 맞은 것이 다행이라고 애써 생각해 보았다.
미술사박물관은 작품들보다도 건물 자체가 워낙 화려하고 예뻐서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곳이었고, 국립도서관은 나 역시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마치 영화 미녀와 야수 속에 나오는 도서관 같아서 가보고 싶었다. 미술사박물관은 평소와 같이 사람이 많았고, 국립도서관은 방문객이 많지 않은 편이라고 들었는데 비바람 치는 날이라 다들 실내로 온 건지 생각보다는 인파가 꽤 있었다.
바깥은 전쟁이었으니 다들 안으로 숨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일단 실내에 있으면 추위와 빗줄기로부터는 안전하니까. 게다가 미술사박물관 내에는 앉아서 작품을 오래 감상할 수 있는 의자가 많았다. 푹신하게 앉아있으니 마치 마사지 의자에 앉은 것처럼 편안했다.
좌: 빈 미술사박물관 / 우: 오스트리아 국립박물관
하지만 사실, 실내는 실내대로 실내의 전쟁이 있었다. 바깥의 날씨는 실내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했다.
우선 실내에 들어가는 동시에 우비를 벗어서 접은 뒤 비닐에 쑤셔 넣어서 가방 안에 넣어야 했다. 빗물을 가득 품은 우비를 털지 못한 채 비닐 속으로 욱여넣는 일은 매번 힘이 들었고, 비닐에 담긴 우비를 또다시 작은 가방 속에 욱여넣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거기다가 패딩까지 손에 들거나 허리에 묶으면, 바람만큼은 아니어도 우리를 짓누르는 묵직한 짐 콤보가 완성되었다. 각 건물의 물품보관소들은 모두 줄이 너무 길었으므로 기다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실내에서는 묵직한 짐과의 사투가, 실외에서는 사람까지 뒤흔드는 폭풍우가 힘들었다. 어느 쪽에 있어도 불평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저 지금 여행하고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 힘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실내가 낫다는 걸 깨달은 건, 실내는 원한다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빈에서의 관광이 대부분 실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한 곳에만 내리 있을 수는 없었다. 식당과 카페에서도 식사를 마치면 나가야 하듯, 관광명소에서도 구경을 마치면 다시 나가야 했다.
성슈테판대성당
박물관과 도서관을 거쳐, 성슈테판대성당으로 향했다. 고딕 양식의 성슈테판대성당은 지붕이 모자이크 형태로 되어있어 매우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앞에서 서둘러 사진 몇 장을 찍고 들어선 성당 내부에는 마침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성가도 듣고 미사 보는 모습도 볼 수 있어 좋았다. 다만 그만큼 구경하는 관광객들도 많았기에 오래 있기는 불편했다.
시계를 보니 4시 50분이었다. 매 정각마다 움직인다는 근처의 인형시계를 구경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역시 관광객의 숙명이란, 결국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인형시계는 성슈테판대성당에서 골목 하나만 지나면 있었지만, 밖에 서서 봐야 한다는 것이 이날의 관광객들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정각마다 새로운 인형이 나온다는데, 5시 정각이 되었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다. 누군가의 후기에 따르면 10분씩 늦기도 한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빗속에서 기다려보았다. 우리 외에도 몇몇 관광객들이 우리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하지만 인형시계는 변화가 없었다. 마치 오스트리아를 떠나지 않는 폭풍 보리스처럼.
그냥 저 인형이 다 나온 거 아닐까, 오늘따라 5시가 되기도 전에 일찍 나온 건 아닐까, 우리는 결국 현실과 타협을 하고 자리를 떴다.
빈 인형시계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저녁식사 예약시간까지는 아직 50분이나 남아있었다.
'성당에 다시 들어가기는 좀 그렇고… 곧 저녁 먹을 건데 지금 뭘 사 먹을 수도 없고… 박물관은 좀 피곤하고… 그만 걷고 싶은데 어딜 들어가면 시간을 때울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비를 피할 쉼터를 찾아다닌 적이 있던가. 여행 중에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맞닥뜨린 적도 많았고, 가랑비가 갑자기 장대비가 된 적도 많았다. 그렇지만 웬만하면 우산 혹은 우비를 쓰고 걸을 만했다. 또는 몇 시간 뒤에 그쳤거나. 하지만 이번에는 재난이었다.
성슈테판대성당 앞 거리
결국 고민 끝에 성슈테판대성당 앞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이나 오스트리아나, 무료로 편하게 실내에 있을 수 있는 건 역시 지하철역이었다. 우비를 곱게 개서 가방에 쑤셔 넣지 않아도 되는, 단비 같은 쉼터. 지하철을 탈 건 아니었지만 7일권 티켓을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탑승장 앞에 있는 의자에 셋이 쪼르르 앉아 오고 가는 지하철을 몇 번 바라봤다. 누가 보면 싸운 것처럼, 대화도 없이, 셋 다 눈이 풀린 채로, 그렇게 가만히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많은 여행자라면 이런 때에는 그냥 호텔에서 이것저것 배달 시켜 먹고 쉴 텐데. 한번 여행하면 일주일 정도의 시간밖에 낼 수 없는 평범한 한국 직장인은 이럴 때 서럽다.
그래도 그렇게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보낸 30분은 소중했다. 잠에 들지 않아도 눈을 감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피로가 풀리는 기분과 비슷한 것 같다. 아주 조금 기운을 차리고, 예약해 둔 식당으로 천천히 향했다.
힘들게 기다려서 간 식당은 다행히 만족스러웠다. 그저 납작한 돈가스라고만 생각했던 슈니첼이었는데, 유명 맛집에서의 슈니첼은 이번에 오스트리아에서 먹은 모든 음식을 통틀어 가장 맛있었다. 담백하면서도 촉촉했고, 사이드로 함께 주문한 감자샐러드까지 이렇게 특별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함께 주문한 타펠슈피츠는 고기와 야채를 넣고 끓인 스튜로 갈비탕 같았는데, 뜨끈해서 몸을 녹여주고 속도 개운하게 해 주었다.
좌측부터 슈니첼, 타펠슈피츠, 감자샐러드
서빙을 해준 담당 서버도 너무나 친절했다. 방문하는 관광객들로부터 배웠다는 약간의 한국어를 하며, 밝고 유쾌하게 응대해 주었다. 덕분에 날씨에 지치고 얼어붙은 우리 기분도 한결 풀렸다.
이대로 호텔 방으로 들어가 이불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폭풍우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미션 하러 갈까?"
비록 우비를 입고 빗속에서 춤을 추지는 못하더라도, 반짝이는 빈 오페라하우스의 야경만큼은 부모님과 함께 보고 싶었다.
오페라하우스가 예쁘게 내려다 보이는 알버티나 미술관 2층은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나온 배경이기도 한데, 역시나 이날은 로맨틱한 분위기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옆으로 날아드는 빗줄기, 그 빗줄기를 때려 넣는 바람 소리, 그리고 그 바람으로 인해 날아다니는 우비와 가려지는 시야.
우리 외에 다른 사람들도 그곳에서 서둘러 사진 몇 장 찍고 건물의 지붕 아래로 도망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각자의 여행을 어떻게든 이어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모두들 지쳤지만, 그래도 예쁜 풍경을 보았을 때 으레 짓는 약간의 미소는 잃지 않은 채로.
빈 오페라하우스 야경
'이렇게까지 힘들게 여행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 하루였지만, 어쩌면 이렇게까지 힘들게 여행하는 날도 필요한지도 모른다. 더 이상 최악일 수 없을 것 같은데 또 최악을 맞이하는, 그런 여행. 이런 여행이야말로 우리에게, 그리고 그날을 함께 겪은 모두에게,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날씨는 꾸준하게 폭풍우가 쳤지만 마음은 오락가락 롤러코스터 같았던 빈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흘러갔다. 인스브루크와 잘츠부르크에 간 뒤 다시 되돌아올 빈이지만, 비 오는 밤은 이것으로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있는 대로 비바람을 맞다가 드디어 호텔로 돌아갔는데, 그 길도 순탄치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내릴 곳을 한 정거장 지나치는 바람에 쓸데없이 시간이 더 소요되었고, 도착한 호텔 정문 입구는 폐쇄되어 있었다. 비바람에 회전문이 깨진 모양이었다. 반대편 입구로 오라는데, 그 반대편이 어딘지 몰라 한참을 헤매다 겨우 들어갔다.
폐쇄된 호텔 정문
로비에서 탑승한 엘리베이터에는 미국 억양의 중년 여행자들이 함께 탔다. 작은 엘리베이터였기에 그들끼리의 대화가 우리에게도 자연스레 들렸다.
"내일 날씨는 어떻대?"
"뭘 물어, 똑같겠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우리도 함께 빵 터졌다. 그들은 내일도 빈을 여행해야 하는데 날씨 때문에 또 걱정되는 눈치였다. 오늘 우리는 각자 다른 곳 혹은 같은 곳에서 얼마나 비슷한 시련을 많이 겪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