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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Dec 05. 2024

아빠와 의절할 뻔한 날

3번의 기차와 1번의 버스 (1)


빈을 떠나 날 아침. 인스브루크로 향하는 7시 8분 기차를 타기 위해 5시에 일어났다. 며칠 사이 날씨 때문에 지연되고 취소된 열차가 많아서 눈 뜨자마자 메일함부터 확인했는데, 다행히 철도회사로부터 온 연락은 없었다. 빠르게 짐을 정리하고 6시 전에 호텔을 나섰다.


호텔에서 빈 서역까지는 600m 거리로 가까웠는데, 그렇다 해도 걸을 수는 없는 날이었다. 어둠 비바람을 맞으며 짐을 끌고 갈 엄두 나지 않아서 트램을 타고 갔다. 딱 한 정거장이었다.


트램에서 내려 역으로 들어가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맞은 새벽바람, 무거운 트렁크를 손에 들었음에도 몸이 휘청거렸다. 이 지긋지긋한 날씨와 오늘 깔끔하게 이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인스브루크에 당도했으면 좋겠다고.



역에 도착해 보니 많은 사람들이 전광판 앞에 몰려 있었다. 많은 열차들에 '취소' 표시가 붙어있었다. 별다른 연락이 없었던 우리 차 역시 30분 지연되어 있었다. 그래도 취소된 건 아니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전광판을 자세히 살펴보니, 취소된 대부분의 기차들이 잘츠부르크행 기차들이었다. 우리는 인스브루크로 가는 것이지만, 빈에서 출발하는 인스브루크행 기차는 노선상 잘츠부르크를 거치게 되어있었다. 잘츠부르크가 종점인 기차들은 취소되었는데, 같은 노선을 타고 가는 우리 기차는 30분만 지연이라니, 안심하기에는 이른 것 같았다.


아직 고객센터 사무실들은 열지 않은 시각. 탑승구역을 살펴보니 다행히 직원 한 명이 서 있었다.


"저희 기차, 인스브루크까지 쭉 가는 건가요?"

"여기서 기차를 타고 암슈테텐(Amstetten)에 가시면 버스가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버스 장크트 발렌틴(St. Valentin)까지 데려가줄 겁니다. 거기서 다시 기차로 갈아타시고 인스브루크까지 가시면 돼요."

"아, 감사합니다. 버스로 이동하는 구간은 얼마 정도 되나요?"

"음, 한 20분 정도일 거예요." (실제로는 30분 넘게 소요되었다)

"감사합니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 덕분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내가 예약한 건 직행 열차였지만, 인스브루크까지 어떻게든 갈수만 있다면 아무렴 어떠랴.



암슈테텐에서 장크트 발렌틴 구간은 비로 인한 산사태로 기차 이동이 불가해졌다고 했다. 그래도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구간 몇 시간이 아니라 몇십 분 정도이니, 시간이 크게 지체되지않을 것이었다. 천재지변의 상황에서 그나마 최악은 면한 듯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빈에서의 불운은 이것으로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다. 진짜 아수라장은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의심조차 하지 못했지.



[첫 번째 구간 : 웨스트반 기차 (빈 ~ 암슈테텐)]


오스트리아에는 대표 철도 회사가 두 개 있는데, 바로 OBB와 Westbahn(웨스트반)이다. OBB가 좀 더 오래된 회사고 웨스트반은 비교적 신설된 업체다.


우리는 빈~인스브루크 구간은 웨스트반으로, 며칠 후 인스브루크~잘츠부르크 구간은 OBB로 예약을 했다. 이날은 웨스트반을 타는 날이었다.



웨스트반 기차는 새것처럼 깨끗해서, 쾌적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기차가 낡았다고 해도 기분은 여전히 좋았을 것이다. 달리는 기차 안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들으니까.


"드디어 빈 탈출이다!!"


멋진 미술작품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빈에서 보낸 시간의 80%가 '비바람 뚫기'에 소모되었기에 그 미션 같은 모진 여행을 마쳤다는 사실이 개운했다. 미리 예고되었던 30분의 지연 이후 추가적인 지연 없이 바로 출발 점도 속 시원했다. 창문에는 빗방울들이 계속 부딪혔지만 빗소리는 더 이상 크게 들리지 않았다. 철길 위를 달리는 열차 소리가 다른 소리들을 덮어버다.


기분이 좋아진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는데, 바로 인스브루크의 날씨였다. 내내 비가 올 거라고 하더니, 딱 이날 오후, 그 반나절만큼은 비가 오지 않을 거리고 했다. 전날까지 내내 비가 왔고, 다음날 또다시 비가 올 것이었지만, 이날만 예보가 바뀐 것이었다. 나절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니, 오랜만에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기대한 곳이 바로 인스브루크였다. 이전 오스트리아 여행 때는 가보지 못했던, 오스트리아 알프스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이상의 시간 자체 없이, 빠르게 인스브루크에 도착하기를 기원했다.


'인스브루크제시간에 도착했으면 하는 소원 정도는 빌 수 있잖아요? 빈에서 비 그쳐 달라는 소원 같은 건 아예 빌지도 않았는걸요. 반나절이라도 맑은 날씨 한 번만 만끽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제발요.'


평소 신을 간절히 믿지도 않으면서 이날은 염치도 없이 간절하게 외쳐댔다. 필요한 게 있을 때만 찾는 나 같은 신자의 소원이 얼마나 잘 이루어질지는 몰라도 그래도 일단은 열심히 속으로 빌었다.


인스브루크에 가면 곧장 'Top of Innsbruck'라 불리는 노르트케테 산맥의 하펠레카르슈피츠 정상에 오를 생각이었다. 딱 반나절만 맑다면, 산에 가야 했으니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산 정상까지 가볍게 트레킹 할 계획이었으므로 서너 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케이블카는 오후 6시까지 운행했기 때문에 늦어도 2시에는 인스브루크 역에 도착해야 했다.


빈에서 암슈테텐까지는 약 1시간. 나는 각 정차역의 도착 예정시간을 보여주는 스크린을 노려보다, 별거 안 보이는 창밖을 내다보다, 인스브루크 날씨 예보를 휴대폰으로 찾아보다, 휴대용 키보드를 꺼내 밀린 일기를 쓰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어느 것 하나 집중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기차는 금방 암슈테텐에 도착할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두 번째 구간 : 버스 (암슈테텐 ~ 장크트 발렌틴)]



기차가 서행을 시작하자, 모두들 각자 실어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우리도 빠르게 캐리어를 꺼내 들고 열차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날씨 때문인지 승객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내려보니 우르르 몰려 이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2층짜리 기차여서, 내가 보지 못한 곳에도 생각보다 많이 타고 있었나 보다.


암슈테텐은 소도시이지만 그에 비해 역이 아주 작지는 않았는데, 출구 표시를 찾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휩쓸려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쫓아가게 되었다. 다들 현지인들인 건지, 자신 있게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는 혹시라도 멈칫하다 뒤쳐질세라 열심히 뛰어갔다.


"얼른 화장실 좀 들렀다 갈게!"


역을 막 빠져나가려는데, 아빠가 갑자기 화장실에 들른다고 했다. 그때는 몰랐지. 이것이 불러올 파장을….


나는 우선 앞사람들을 따라서 나고, 엄마는 아빠를 기다렸다가 뒤따라 오겠다고 했다. 사람들의 행렬을 뒤쫓아 달려가 보니 버스가 세 대 서 있었다.


맨 앞 차는 좌석이 다 찼고, 두 번째 차에는 아직 자리가 남아있었다. 그런데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사이에 두 번째 차도 금세 다 차버려서 우리는 결국 마지막 세 번째 차에 올라야 했다.


앞에 서 있던 두 대의 스는 사람들로 가득 차기 무섭게 바로 출발했다. 하지만 우리 차는 미동도 없었다.


버스 안에는 곳곳에 빈 좌석이 있었다. 아마 아직 역에서 오지 못한 사람이나 아빠처럼 화장실에 간 사람이 있을까 봐 기다리는 듯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렇지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출발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불안감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 제발… 언제 떠나는 거야… 빨리 가야 하는데…'


빈 좌석은 더 이상 채워지지 않았고, 기사마저 버스에서 내렸다. 아무래도 다음 기차가 오기를, 그래서 버스가 승객들로 완전히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다음 기차가 언제 오는지, 제시간에 오기는 하는지, 우린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답답하고 불안해도 우리에게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인스브루크의 맑은 날씨가 오래 버텨주길 바라며 예보를 찾아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저녁 7시부터 다시 흐려진다던 날씨가, 오후 4시부터 흐려지고 5시부터 비가 온다는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에게 허락되었던 반나절이 고작 두어 시간으로 줄어든 것이다.


울고 싶었다. 내내 비가 오고 흐릴 거라고 했을 때는 다 포기했었는데, 잠깐이라도 맑을 가능성이 생기고 나니 그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한 가지라도, 딱 한 가지만이라도 내가 원했던 대로 구경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그토록 무리한 소원이었나.


버스 안에서 엄마와 나는 옆에 나란히 앉았고 아빠는 우리 앞자리에 앉았다. 평소에는 수시로 장난치고 농담을 하는 아빠인데, 버스가 계속 출발하지 않 아빠는 미안함에 뒤도 돌아보지 못하셨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던 아빠의 잘못도 아니었고, 버스가 이렇게 순차적으로 출발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 그냥 운이 안 좋은 것뿐이었지만… 불운이 빈에서 끝나지 않고 인스브루크까지 따라오는 것이 너무나 속상하고 착잡했다.


언제든지 다시 여행하면 된다고 생각하려 애썼지만,  몇 분의 차이로 도착 시간이 몇 시간까지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해서, 그렇게 마음무너져 내렸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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