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질끈 감은 채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기를 30분. 3시간처럼 느껴지던 그 시간이 드디어 끝나는 건가 했더니…
'아 또 왜!!'
버스가 이동하길래 출발하는 줄 알았건만, 그저 다음 버스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우리 버스는 아까 첫 번째 버스가 서 있던 곳으로 이동해 다시 주차를 했고, 뒤이어 새로운 버스들이 나타나 우리가 서 있었던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도 희망적인 일이었다. 곧 새로운 승객들이 올 거라는 신호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아까 우리가 걸어왔던 방향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이번에 도착한 기차 기준으로는 우리 버스가 맨 처음 출발하는 버스였다. 버스는 순식간에 가득 채워졌고, 바로 출발했다.
앞서 간 버스 두 대에 비해 약 30분가량 더 늦어진 셈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달리고 있었으니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채 마냥 기다려야 했던 때보다는 덜 답답했다. 노르트케테의 날씨가 조금만 더 기다려주길, 산 전망대에서 단 10분만이라도 맑은 날씨가 허용되길, 계속해서 간절하게 바랐다.
[두 번째 구간과 세 번째 구간 사이, 장크트 발렌틴역]
빈 서역의 역무원이 암슈테텐에서 장크트 발렌틴까지는 버스로 20분 정도 걸린다고 했었는데, 지도상으로 찾아보니 최소 30분은 걸리는 구간이었다. 아마 기차 기준으로 답해주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이날은 날씨까지 좋지 않다 보니 조금 더 소요되었다.
버스가 장크트 발렌틴 역 앞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또 빠르게 내려서 달려갔다. 장크트 발렌틴은 암슈테텐보다 더 작은 도시였는데, 역 입구는 더 크게 느껴졌다.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장크트 발렌틴이 어떤 도시인지보다, 우리가 바로 갈아탈 수 있는 다음 기차가 몇 시에 어디서 오는지가 더 중요했으니까.
장크트발렌틴에서 인스브루크까지 한 번에 가는 기차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일단은 잘츠부르크까지 갔다가 인스브루크행 기차로 다시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실시간으로 기차 출도착 현황을 알 수 있는 앱 정보를 알려주었다. 덕분에 며칠 뒤까지 유용하게 잘 썼다.
"앱에 따르면 린츠에 갔다가 인스브루크까지 가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은데, 그래도 잘츠부르크를 거치는 것이 나을까요?"
"뭐라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린츠보다는 잘츠부르크가 나을 거예요. 잘츠부르크에서 인스부르크 가는 게 더 자주 있으니까요."
린츠를 경유할 경우 당시 스케줄상 바로 환승할 수가 있어서, 잘츠부르크를 경유하는 것보다 시간이 3~40분 정도 단축되었다. 역무원이 잘츠부르크 환승을 권했지만 10분, 20분도 아쉬운 상황이었기에 마음속에서 수십 번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외지인일 뿐이니, 역무원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이건 엄청나게 잘한 선택이었다. 나중에 실시간 기차 앱을 살펴보니 린츠에서 인스브루크로 가는 기차는 취소되어 있었다. 만약 린츠로 갔다면, 이날 인스브루크에는 한참 뒤에나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가 생겼을지는 모르겠지만.
[세 번째 구간 : 기차 (장크트 발렌틴 ~ 잘츠부르크)]
장크트 발렌틴에서 탑승한 잘츠부르크행 기차 역시 웨스트반 기차였다. 모든 교통이 마비되고 아수라장이 된 날이라, 티켓상 표기된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라면 OBB와 웨스트반 중 그 어떤 것을 타도 괜찮다고 역무원들이 여러 차례 강조했다. 우리는 어차피 웨스트반 티켓을 소지하고 있었으니 당시의 우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시스템이 잘 갖춰진 나라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기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같은 칸 안에서 큰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티켓 검표를 하던 중이었는데, 우리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은 다 문제없이 지나갔지만 한 아저씨의 티켓이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정황상 아저씨는 '내 티켓도 인정해 달라'라고 주장하고 있었고, 검표하던 직원은 '안 된다, 돈을 내야 한다'라고 하는 듯했다. 서로 언성이 높아지더니 결국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에 이르렀다. 직원은 결국 그 승객에게 다음 역에서 내리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는 계속 버티고 내리지 않았다.
직원과 승객은 복도에서 싸움을 이어갔다. 어느 역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차는 다음 역에 계속 정차해 있었다.직원은 열차 문을 연 채로 승객을 내리게 하려 했고, 승객은 계속 안쪽에 두발 굳게 붙이고 서 있었다.
나는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열심히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이 알 수 없는 곳에 계속 서 있어야 하다니. 이게 마지막 기차도 아니고, 우리는 잘츠브루크에 가서 인스브루크행 기차로 또 한 번 더 갈아타야 했다. 그 기차를 놓치면 오늘 계획은 다 무산된다.
화가 난 승객들
어느새 우리 좌석 주변에 앉아 있던 덩치 큰 오스트리아 아저씨들이 혼잣말로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독일어는 몰라도, 좋은 말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다들 이미 여정이 지체되었을 상황에서, 이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정차해 있는 상황이 화나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직원은 단호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승객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덩치 큰 남자 승객들이 둘러싸고 저마다 의견을 보탰다. 하지만 결국 어느 한쪽도 이기지 못했고, 화난 표정으로 일어났던 승객들은 한참 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자리로 되돌아와 앉았다.
나도 답답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저희 언제 출발할 수 있나요? 심각한 문제가 있나요?"
"경찰을 불렀어요. 곧 올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 사람 내리면 출발할 거예요."
경찰까지 불렀다고 하니 여기서 쉽게 마무리될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너무 답답하고 속상했다. 이토록 어이없는 상황이라니. 날씨만 문제인 줄 알았더니, 사람들마저 도와주지 않는 하루였다.
곧 경찰이 4명이나 기차에 탑승했다. 그들은 직원의 말을 듣고는 승객을 인솔하려 하더니, 승객의 말을 듣고서는 고민에 잠긴 듯했다. 양쪽의 말을 들은 다음,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더니 내려버렸다.
잘 안 보이지만, 경찰들이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다
황당했다. 경찰만 오면 해결된다더니 변화가 없었다. 처음에는 말을 듣지 않는 승객이 원망스러웠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 승객이 억울하고 직원이 억지를 부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경찰의 도움을 받지 못하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기차는 잠시 뒤 출발했다. 그 승객도 잘츠부르크에서 내리던데, 경찰을 부르더라도 잘츠부르크에 가서 부를 수는 없었던 걸까. 그 사건 때문에 우리는 일정이 또 30분 더 지체되었다.
[네 번째 구간 : 기차 (잘츠부르크 ~ 인스브루크)]
드디어, 잘츠부르크에 도착했다. 구름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하늘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먼발치의 산들에는 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인스브루크에도 눈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우선은 인스브루크가 다시 흐려지기 전까지 빨리 도착해야 했지만.
기차 플랫폼에 OBB 기차가 들어왔다. 하지만 취리행이라고 적혀 있어야 할 기차에는 ‘부다페스트행’이라고 적혀 있었다. 부다페스트는 인스브루크와는 반대방향이라 잠깐 우왕좌왕했는데, 결국 취리행으로 재표기되면서 무사히 탑승했다. 뭐 하나 한 번에 믿을 수는 없는 날이었다.
짐도 많고 사람도 많았지만, 그래도 운 좋게 마주 않는 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제 드디어, 마지막 기차였다. 더 이상 갈아탈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
'제발, 별문제 없이 끝까지 가길!'
탑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표를 시작했다. OBB 검표원에게, 인스브루크로 가는 웨스트반 티켓을 보여주었다. 이날은 뭐든 다 타도 되었으니. 하지만,
"이 티켓은 안 돼요!"
"어? 오늘은 아무거나 다 타도 된다고 들었는데요."
"아니에요! 다음에는 절대 안 돼요!"
직원이 굉장히 화난 표정으로 엄청 크게 소리를 질러서 우리 가족 모두 깜짝 놀랐다. 분명 오늘은 OBB와 웨스트반 둘 중 아무거나 타도 된다고 역에서도 안내가 되고 있었고, 그날 하루 만난 모든 직원들도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안 된다니?
"다음엔 절대 안 돼요!"
그렇다고 돈을 더 내라는 것도 아니었다. 직원은 우리는 지나 바로 다음 승객의 티켓을 검표하면서 또다시 나를 향해 뒤돌아보며 소리 지를 뿐이었다.
'… 뭐라는 거야.'
황당함에 고개를 내젓다가 건너편에 앉아있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은 돼요. 오늘은 타도 되는 건데…"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이야기해 주시더니 검표하던 직원을 이상한 눈초리로 흘겨봤다. 나는 감사하다고 하고 가볍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종차별이었다. 그는 아까 우리와 함께 웨스트반 기차를 타고 왔던 다른 여자의 티켓도 군소리 없이 검사하고 지나갔다.
'누굴 바보로 아나.'
OBB가 대체로 웨스트반보다 비싸니까, 남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하지만 이 정신없는 날 제한적으로 두 기차를 혼용할 수 있게 해 줬다고 해서, 다음번에 웨스트반 티켓을 들고 당당하게 OBB 기차를 탈 멍청한 여행자가 어디 있겠니? 별꼴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소리를 지르다니, 정말 세상엔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잊어버리자, 도착만 제대로 하면 되지."
가뜩이나 아침부터 기차에 버스에 갈아타러 다니느라 지쳤는데, 아니 며칠 전부터 빈에서 비바람 폭격 맞으며 한참을 지쳐 있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눈을 치켜들고 화를 내니 기분이 제대로 상했다. 이상한 사람이 한 짓이니 계속 담아두면 우리만 손해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더 이상 화를 낼 힘도 없어서, 우리끼리 조금씩 볼멘소리를 하다 번갈아가며 눈이나 붙였다.
'이 여행… 어떻게 끝나려나.'
날씨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너덜너덜해졌다. 대화할 힘도 없고, 무언가에 집중할 힘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창밖만을 쳐다봤다. 기차는 멀리 작은 마을들이 보이는 벌판을 지나다, 평소보다 많이 차올랐을 강을 지나다, 또다시 벌판을 지났다. 중간중간 비가 조금씩 왔다가 그쳤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구름으로 가득했던 하늘에 변화가 생겼다. 구름 사이가 슬쩍 갈라지더니, 푸른 하늘의 흔적들이 보이고, 멀리 산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설산이었다. 초가을인 9월에는 절대 볼 수 없으리라 믿었던 설산들이, 눈으로 한껏 단장한 채로 우리 기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