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9월의 오스트리아 여행을 계획하던 때, 딱 한 가지 아쉽게 느껴지는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인스브루크에서 설산을 보지 못할 거라는 것이었다. 인스브루크의 산들은 높아도 3천 미터 안팎이기 때문에 눈은 봄에서 여름 사이 대부분 녹고, 늦가을부터 다시 쌓이기 시작한다. 그러니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인 9월에는 눈을 볼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런데 지금, 기차 차창 너머에 설산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폭우가 내렸기 때문이었다. 도심에 폭우가 내리는 동안, 지대가 높은 곳에는 폭설이 내렸으니까.
도시가 가까워지면서 기차는 서서히 속력을 늦추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에서 배경음악이 극적으로 단조에서 장조로변주되는 듯했다. 구름인지 눈인지 모호했던 산의 하얀 윗부분은 날씨가 개면서모두 눈인 것이 분명해졌고, 덕분에우리의 표정과 기분도 점차 먹구름에서 벗어났다. 좋은 일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오스트리아 여행도, 이렇게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빈에서 직행열차로 4시간 반 소요된다던 인스브루크를, 우리는 기차 3번과 버스 1번으로 7시간 만에 왔다. 기차도 버스도 늦게 출발하고, 중간에 검표 직원과 승객 간 싸움으로 허비된 시간까지 더해진 탓이었다.
"우리 오늘, 점심 못 먹어."
"그래, 배고프면 가방 안에 있는 과일들 먹으면 돼."
나름 비장하게 말했는데 부모님은 흔쾌히 괜찮다고 하셨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점심을 먹을 여유는 없었다. 오후 3시 전에 노르트케테 전망대에 올라 충분히 구경하려면(노르트케테 전망대 케이블카는 6시에 운행이 종료된다), 인스브루크 중앙역에 어떻게든 2시 전에 도착해야 했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딱 1시 50분이면 도착할 예정이었다.거기서 식사시간을 별도로 마련할 수는 없었다. 여유가 있다면 무조건 구경하는 데에 써야 했으니까.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 하니까, 도착하면 호텔 대신 역에 있는 짐 보관소에 캐리어 맡겨놓자. 그리고 2시 전에 도착하면 시내부터 잠깐 구경한 다음에 노르트케테로 갈까? 저녁에는 다시 흐려지고 비 온대."
"그래, 좋아! 나중에 내려와서 아쉬울 수도 있으니까."
소중한 반나절, 한 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최대한으로 즐기기 위해 머릿속으로 최선의 일정을 실시간으로 수정하고 계획했다. 산으로 바로 가는 대신 시내를 들르기로 한 것은, 전망대에서의 풍경이 흐릴 수도 있으니 시내의 맑은 날씨라도 잠시 즐기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망대의 상황은 인터넷에 공개된 웹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일기예보와 달리 계속 흐려 보였다. 산에서의 날씨는 수시로 바뀔 테니 언제 올라가도 결국 운이 따라야 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도심의 날씨는 지금 우리 눈앞에 분명하게 보였으므로, 더 이상의 지체 없이 역에 제대로 도착한다면, 우선 확실한 시내를 아주 잠시 돌아다니기로 했다.
호텔에 가는 대신 역의 짐 보관소를 이용하기로 한 것도 시내를 구경할 잠깐의 짬을 더 만들기 위함이었다. 호텔은 역에서 고작 500미터 떨어져 있었고 중심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지만, 잠시의 시간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처음 방문하는 호텔을 찾아가는 길에는 변수가 있을 것이었고, 호텔을 빠르게 찾아간다고 해도 로비에서 짐을 맡기는 데에도 시간이 또 소요될 수 있었다.
그러나…
'Out of Order (고장)'
그럼 그렇지. 역내 짐 보관함이 곳곳에 있었지만, 야속하게도 기기마다 고장 났다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역 안을 달리고 달려 고장 나지 않은 곳을 딱 한 군데 찾았지만, 다른 곳들이 다 고장 나서인지 이곳에만 사람들이 몰려들었는지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운이 좀 풀리나 했더니!'
캐리어 세 개를 들고 전망대까지 오를 순 없었으니, 이젠 어쩔 수 없이 호텔로 달려가야 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역에서 나와 가까운 설산 풍경에 감탄한 것도 잠시, 곧장 호텔 방향으로 직진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사진은 반쯤 뛰어가면서 찍었다.
그래도 다행히 호텔 로비에는 손님이 없었고, 직원은 순식간에 짐을 접수해 받아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백팩만 메고 홀가분한 상태로 재빨리 시내로 달려갈 수 있었다.나는 아직도 인스브루크를 떠올리면 달린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우리는 가장 먼저 인스브루크의 메인 거리인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로 향했다. 예쁜 건물들 뒤로 빼꼼 보이는 설산은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웅장했다. 설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많이 가본 것 같지만, 이렇게나 가까이 보이는 곳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다급한 발걸음
오래 기대했던 인스브루크와의 첫 만남이 다소 다급하게 이루어진 점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쁜 마음이 더 컸다. 무사히 이곳에 도착했다는 생각과 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멋진 도시의 모습이 이번 여행 처음으로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바쁘더라도 감탄사는 충분히 내뱉으며, 풍경들을 빠르게 눈에 담았다. 황금 지붕의 반짝이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유명 포토존인 컬러풀 하우스로 향해 갔다. 말 그대로 알록달록한 집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황금 지붕
컬러풀 하우스
눈이 예쁘게 내린 산과 아기자기한 건물들.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설산이 있는 동네에 오니 들뜨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우리, 이러려고 그동안 고생했나 봐."
인스브루크 산 위에 눈이 내리기 위해서는 빈에 비가 내려야 했다. 마치 우리가 폭풍우에 고생하는 동안 인스브루크는 우리를 만날 준비를 해온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난 며칠 간의 고생이 덜 억울했다. 이걸 보기 위해 빈에서 힘겨운 시간을 겪어야 했던 거라면, 그걸 알았더라면, 빈에서 좀 더 즐거웠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음… 아니다. 그 말은 취소. 이걸 직접 보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위로할 수 없었을 테다.
어쨌든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는, 충분한 위로를 받았다. 이제 드디어 원했던 풍경을 선사받았다. 감탄이 나오는 도시의 골목들 사이로, 서둘러 노르트케테로 갈 수 있는 역으로 향했다.
노르트케테로 향할 수 있는 콩그레스역은 한국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와 같은 사람이 디자인해서 비슷한 모양새다
노르트케테 전망대까지 오르려면 한 번의 푸니쿨라와 두 번의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열차 시간은 대부분 연이어 타는 걸 고려했는지, 중간에 큰 대기 시간 없이 갈아탈 수 있었다.
먼저 푸니쿨라를 타고 헝거부르크(Hungerburg) 역에 내렸다. 케이블카 역은 따로 있어서 걸어가는 길, 시내 전경이 멋지게 내려다 보였다. 아주 많이 올라온 것이 아님에도 반대편 산들까지 함께 보이니 너무나 근사했다. 하지만 여기가 종착지는 아니었으니,
"흐려지기 전에, 일단 맨 위까지 올라가 보자!"
먼저 올라갔다가 나중에 다시 내려오는 길에 사진을 더 찍자고 했다. 위에서 더 멋진 풍경을 많이 만나서 그럴 일은 없었지만.
헝거부르크(Hungerburg)역에서의 전망
첫 번째 케이블카를 타고 내린 곳은 제그루베(Seegrube)였다. 원래는 여기도 가볍게 트레킹을 할 계획이었는데,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길이 거의 보이지않았다. 눈이 한가득 쌓여있는, 완전한 겨울 풍경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여기저기서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다들 신나게 눈을 즐기고 있었다.우리도 트레킹 생각은 고이 접아두고, 눈 속을 뛰어다녔다.
제그루베(Seegrube)
"빈에서 패딩 안 샀으면 어떡할 뻔했어?"
한국에서 챙겨 온 짐에는 가디건과 바람막이 정도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는 턱도 없는 추위였다. 빈에서 급하게 산 패딩이 아니었다면 오래 서 있지도 못하고 내려가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빈의 폭풍우에 감사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덕분에 거센 추위를 맞이할 준비가 된 채로 인스브루크의 눈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제그루베(Seegrube)
패딩 안에 바람막이까지 잘 껴입고, 반사되는 햇빛을 막기 위해 선글라스까지 꼈다. 눈이 이렇게 쌓일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해서 장갑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꽤나 준비된 여행자들이었다. 9월의 눈을 밟는 것도 재밌었고 밑으로 보이는 시내 풍경은 멀어질수록 더 넓어져서 좋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보인 하이커들
제그루베를 실컷 구경한 뒤, 다음이자 마지막 케이블카를 탔다. 종착역인 하펠레카르(Hafelekar)까지는 금방이었다.
제그루베에서도 추워서 손이 얼 것 같았는데 여기는 더 추웠다. 그런데 높아진 지대만큼 그 풍경의 멋진 정도도 급상승했다. 미리 온라인 웹캠을 찾아봤을 때는 너무 흐려서 아무것도 안 보일 수도 있겠다고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올라왔는데, 이렇게나 풍경이 잘 보이는 걸 보면 심한 눈보라 때문에 카메라 자체가 더러워진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펠레카르(Hafelekar)에서 보이는 전경
멀리 보이는 정상
"저기만 한 번 올라가 볼까?"
"정상? 너무 미끄럽지 않을까?"
"아니, 정상 말고. 저기 뒤편."
시내 전경만 보고 내려가려고 했는데, 아빠가 눈썰미 좋게 사람들이 가는 길을 본 모양이었다. 원래는 정상까지 트레킹 하려 했지만 길이 미끄러워서 그건 진작 포기했다. 다행히 아빠가 본 길은 정상방향으로 아주 조금만 올라가면 되었고, 눈이 어느 정도 치워져 있었다. 두 발에 단단히 힘을 주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하펠레카르 (Hafelekar)
"와…"
입이 닫히지 않는 어마어마한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에 마주했던 풍경들도 멋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어마어마한 산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에는 그 대단한 웅장함이 다 담기지 않아서 안타까울 정도다.
내 몸이 떨렸던 건 비단 추위 때문만이 아니라, 내 작은 심장이 다 품을 수 없을 만큼 멋진 풍경에 온마음이 요동쳤기 때문이었다. 바람 때문인지 감동 때문인지는 몰라도, 눈물도 찔끔 났던 것 같다. 구름 틈 사이로 작게 보인 푸른 하늘은 금세 먹구름으로 덮여버렸지만, 그것마저 신비로웠다.
부모님과 나
9월에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설산이라니. 이 모든 풍경을 보면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엄청난 행운이 믿어지지 않았다. 두드려 맞기만 했던 비엔나를 떠나, 시원한 풍경의 인스브루크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도.
나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반전 있는 이야기' 속에 들어와 있었다. 이대로 끝나려나 했는데 그렇지 않을 때, 결국 이렇게 되겠거니 했는데 그렇지 않을 때, 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갈 때 느껴지는 쾌감. 인스부르크에서의 반전은 여행 전체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주었다.
지금 당장 힘겨운 일들을 겪고 있다고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세상 모든 일들은 거대한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불행 역시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순간들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때로는 행운으로 가기 위해 불행을 지나야 한다. 그러니 거쳐가는 모든 순간들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거라고, 믿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