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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Oct 30. 2024

벌과 비와 토마토주스

액땜과 복선은 한 끗 차이

출발 10일 전.


엄마가 벌에 쏘였다.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뒷목이 간지러워 손을 뻗어보니, 벌이 툭, 하고 땅에 떨어졌다고 했다. 다행히 아주 큰 말벌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나와 아빠는 걱정되는 마음에 일단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먹는 약과 바르는 연고를 처방해 주었지만, 알레르기성 반응인지 약효는커녕 엄마의 목 주변온통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엄마는 가려움 때문에 밤낮으로 괴로워하다, 결국 예전에 다니던 조금 멀리 떨어진 피부과까지 찾아가야 했다.


오래전 나와의 남미 여행 중에, 엄마가 피부 알레르기로 페루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브라질 이과수 폭포에서는 이상한 벌레에 쏘여서 응급처치실을 찾아가기도 했다. 엄마의 여행에서 알레르기와 벌레를 영영 퇴치해 버릴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내일모레 여행 가는데, 어떡하죠?"

"제가 최대한 빨리 낫게 해 드릴게요."


역시 그 의사 선생님이 명의였는지, 아니면 그냥 독한 약을 주신 건지, 드디어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돌토돌 올라왔던 피부는 점점 가라앉았고, 빨갛던 피부색도 점차 어두워졌다. 오스트리아에 가서도 여행 기간의 절반 동안은 가려움에 꽤나 고생하셨지만.



출발 5일 전.


이전 글에 적었듯이 기차 시간이 변경된 날이다. 3일간 생각날 때마다 전화를 걸어봤지만 고객센터는 정상적으로 신호음이 들리는데도 불구하고 (심지어 종종 통화 중인 신호음이 들리기도 했는데도)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온라인으로 접수한 문의사항에 대한 답변 역시, 출발 직전까지 메일함을 확인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출발 3일 전.


수시로 확인하던 일기 예보가, 죄다 비로 바뀌었다. 3개 도시에서의 날씨가 이전에는 드문드문 ‘맑음’이나 최소한 '비 없이 흐림'이기도 했는데, 출발 3일 전이 되니 각 도시에서 우리가 머무는 날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비 표시로 바뀌어있었다.  만약 가랑비 정도 오는 거라면 괜찮을 것 같는데, 빈 하루에 100mm 가까이 온다고 되어있어 그 작은 희망마저 꺾여버렸다.


폭풍이 오는 것까지는 그 당시에 알지 못했지만, 비가 내내 쏟아진다고 하니 옷은 날씨에 맞게 잘 챙겨가야 했다. 그즈음 SNS와 여행 커뮤니티에서 실시간 오스트리아 소식을 전해주던 많은 관광객들은 반팔과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우리가 갈 때는 대부분 예상 최고기온이 12~15도였으므로 그렇게는 입을 수 없었다. 방수가 되는 바람막이에 도톰한 가디건, 그리고 긴팔 티셔츠들을 챙기기로 했다.


"반바지?"

"음... 의외로 비가 안 오면 더울 수도 있나?"

"비는 반드시 올 분위기던데."


토론 끝에 각자 얇은 긴팔과 가디건 위주로 챙겼고, 반팔은 혹시 몰라 두어 벌씩만 챙겼다. 바지는 모두 긴바지만 넣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대비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건 전혀 충분하지 않았다. 이 여행에 '충분한 준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반바지를 다 두고 간 건 잘한 선택이었다.


각 도시에 머무는 날마다 비


출발 전날.


다른 항공사였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했다. 내가 탈 비행기가 아니라, 그 비행기의 이전 스케줄을 확인해 보는 일. 인천발 바르샤바행 비행기가 자주 지연되는 이유는, 대부분 이전 연결 스케줄 때문이다.


인천공항에서 운항하는 폴란드 항공 비행기들은 폴란드 바르샤바 혹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해 인천으로 왔다가, 다시 승객들을 태우고 바르샤바로 되돌아간다. 몇 달 전에 부다페스트발 인천행 비행기에서 한 승객이 난동을 부려 우즈베키스탄에 불시착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 비행기에 타 있던 승객들은 물론 다음날 인천에서 그 비행기를 타고 바르샤바로 떠나야 했던 승객들까지도 어마어마한 연착으로 불편을 겪은 바 있다.


나는 출발 일주일 전부터 혹시 큰 문제는 없는지, 항공 스케줄을 수시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의 여행 전날, 비행기는 내 소망대로 바르샤바에서 예정된 스케줄대로 출발했다.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출발 당일.


기차 걱정, 날씨 걱정, 비행기 걱정… 그래도 어쨌든 공항으로 떠나는 마음은 즐거웠다. 추가적인 항공 변경 없이 무사히 출발한다는 사실만으로 다행이었으니까.


혹시 몰라 여유롭게 공항 카운터에 도착했는데, 정확히 출발 3시간 전부터 탑승수속을 한다고 써 붙어 있었다. 이코노미 쪽에는 이미 줄이 굉장히 길게 서 있었는데, 정말 정확히 그 시간이 되어서야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비행 스케줄은 맘대로 바꾸면서 카운터 시간은 칼같이 지키네."


엄마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카운터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건 당연한 업무 절차겠지만, 워낙 비행시간은 제멋대로인 항공사인지라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우리가 탄 모든 폴란드 항공 비행기들은 'Late or Tomorrow'라는 명성에 걸맞게 단 한 번도 제시간이 지켜지지 않고 보딩이 지연되었다.


그리고 이날도, 출발 시간이 1시간 넘게 지연되었다. 그래도 이날은 폴란드 항공의 잘못은 아니었고, 갑작스레 중국이 영공을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유럽행 비행기들은 종종 겪는 일인 듯했다. 다행히 도착 시간은 늦지 않게 잘 맞추어 갔다.



온갖 욕이란 욕은 다 했지만, 막상 탑승해 보니 폴란드 항공의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은 꽤 편안했다. 비즈니스석만큼은 아니지만 앞뒤 간격뿐 아니라 좌석의 너비도 넓었고, 의자가 우등 고속버스만큼 뒤로 젖혀졌다. 음식도 나쁘지 않았고, 식사시간 사이에 주는 간식들도 맛있었다.


나름 편안한 10시간이 흐르고, 내리기 직전 두 번째 식사시간이 되었다. 식사 전에 음료를 먼저 따라주었는데, 부모님은 두 분 모두 토마토 주스를 선택하셨다. 중앙에 아빠, 엄마, 나 순으로 셋이 붙어있는 좌석이었는데, 아빠와 엄마는 같은 통로에서 먼저 서비스를 받았고 나는 내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토마토 주스 맛있다."


아빠는 내게도 주문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어, 어!"


맛있다더니 아빠는 테이블 위 잔을 쓰러뜨려 토마토 주스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버렸다. 한잔 쏟는 걸로도 모자라 옆에 있던 엄마 것까지 두 잔을 다 쏟았다. 하필 방향은 모두 엄마 쪽으로 쏟아져, 엄마의 담요는 물론 그 아래 바지와 운동화까지 다 주홍빛이 되었다. 묽지 않고 약간 점성이 있던 토마토 주스는 휴지 한 번 문지른다고 닦이지 않았다. 승무원들이 물수건까지 잔뜩 가져다주었지만, 아무리 닦아도 새로운 얼룩이 자꾸만 발견되어 끝나지 않는 노동이 이어졌다.


이게 여행 시작 전 마지막 액땜일까 아니면 복선인 걸까 혼자 생각하고 있을 무렵, 내 통로 쪽으로도 승무원이 음료 주문을 받으러 왔다.


"음료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물이요."



그렇게 막판까지 요란하게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바르샤바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호텔로 향하는 길까지도 요란하게 우당탕탕거려서 첫날부터 진을 뺐다.


안 좋은 일은 복선이라고 생각하면 복선, 액땜이라고 생각하면 액땜이 되지 않을까. 그 어느 것도 예상한 대로, 계획한 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착착 진행되었던 여행도 없지만, 반대로 단 한 가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여행도 없었다는 것.


어떻게든, 여행은 여행일 것이었다. 나는 그 무엇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뭐라도 하나쯤은 좋을 것이다.



1)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브런치 매거진 <안녕 보고 싶었어> 혹은 도서 <그렇게 풍경이고 싶었다> 속 페루 쿠스코 이야기를 참조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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