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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Oct 23. 2024

설레기만 하면 될 줄 알았지

항공권의 배신


'로마', '취리히', '류블랴나'…


일정을 먼저 정한 뒤에 여행지를 오래도록 고민하기는 처음이었다. 남들은 진작부터 준비했을 추석 연휴 여행을, 봄이 되어서야 정한 탓이었다.


막연히 부모님과 함께 유럽에 가고 싶었지만, 대부분의 항공권은 이미 비싸진 시점이었다. 그래서 여행지는 항공권 사정에 따라 정하기로 하고, 나는 우선 예매 페이지의 '도착지'란에 부모님이 아직 가보지 않으신 유럽 국가들의 수도를 하나씩 입력해 보았다.


내가 가봤지만 좋았던 국가들 위주로, '자그레브', '암스테르담', … 그러다,


'비엔나'. '빈'.


잠시 멈추어 이름을 응시했다.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2017년에 다녀온 오스트리아 빈


몇 달 전 광장시장의 한 떡볶이 맛집에 갔던 적이 있다. 먹어보기 전에는 '떡볶이가 맛있으면 뭐 얼마나 맛있겠어'라는 마음으로 조금만 사봤는데, 가득 들어간 무의 단맛이 느껴지는 특별한 맛이었다. 한 입 먹자마자 더 많이 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우리가 산 건 그저 한 명씩 맛만 볼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고, 그래서 아주 감질났것이다.


오스트리아 여행기에 갑자기 웬 떡볶이 소리인가 싶겠지만, 내게 오스트리아는 딱 그 광장시장의 떡볶이 느낌이었다. 처음 갈 때는 남들이 다 가기에 나도 가봤을 뿐이었지만, 다녀오고 나서는 충분히 여행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감질나는 곳.


무조건 새로운 나라를 여행하고 싶던 때가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세상에 덩그러니 떨어지는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56, 57, 58까지 늘어난 '방문국가'의 숫자를 올려보는 것 또한 괜히 뿌듯했다.


하지만 몇 년 전 세계여행을 통해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여러 국가들을 대강으로나마 훑어본 경험 덕분인지, 이제는 새로이 가고 싶은 곳들보다 다시 방문해보고 싶은 곳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광장시장에 아직 가보지 못한 맛집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당장 근처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저번에 그 떡볶이부터 다시 먹겠노라 다짐한 것처럼.


그렇게 지난 4월, 부모님과 나, 세 명의 항공권을 예매했다. 막연하게 언젠가 다시 가보고 싶었던 마음이, 당장 5개월 뒤에 가는 분명한 계획이 되었다. 나는 가봤기에 설렜고, 부모님께서는 안 가보셨기에 설레하셨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일은 오스트리아 경험이 있는 내게 일임되었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어차피 내 몫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노트북 화면에 펼쳐둔 지도  많은 지명들이 생각보다 낯익어 반가웠다. 한 번이라도 스쳤던 것들은 잊히지 않고 기억 저편에 깊숙이 보관되는 모양이다. 나는 내가 다녀온 곳들 중에서 부모님께도 보여드리고 싶은 곳들을 추린 다음, 내가 새롭게 해보고 싶은 것들을 추가했다.


빈에서 벨베데레 궁전과 쉔부른 궁전 가기
잘츠부르크에서는 할슈타트 다녀오기
그리고 이번에는 샤프베르크에도 가보기
처음 가보게 될 인스부르크에서는 케이블카 꼭 타기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내게 새로움으로 가득한 나라였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익숙함이 기쁘게 다가왔다.


낯선 곳에 갈 때는 백지에서 시작해야 하므로 처음 갈피를 잡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린다. 하지만 한 번 가봤던 곳에 다시 갈 때는,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 전에 너무 차가울까 싶어서 경계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그 시간이 짧아지면, 더 깊은 물속까지 나를 담가 여행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두 번째 방문하는 오스트리아에 풍덩 빠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2017년에 다녀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5월쯤 되니 대략적인 일정이 정해졌다. 빈에서 시작해 인스브루크와 잘츠부르크를 거쳐 다시 빈으로 돌아와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부모님께 간략히 브리핑도 했다.


평소 소위 '부모님 여행 십계명'(*)이 필요한 분들은 아니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혼자 여행할 때보다는 좀 더 체계적으로 세우려 애쓴 계획이었다. 좋은 곳에 많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대한 변수방지해보고 싶어서 더 열심히 조정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일정 자체가 길지 않아서 좀 바쁘게 다녀야 할 거야. 특히 빈이랑 잘츠부르크. 그래도 인스브루크에서는 조금 여유롭게 다닐 수 있어."


다행히 이의 제기는 없었다.


6월부터는 숙소와 기차표도 주기적으로 검색하며 가격 추이를 지켜보았다. 가격 변동이 큰 것들은 미리 예약해 두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조금 더 고민한 뒤 정해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7월이 되었다. 여행을 두 달 앞두고,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예약을 했거나 예약할 준비가 다 되어있는 상태였다. 쌓여가는 예약확인서를 정리해 두고자 메일함으로 들어간 나는, 원하는 것을 검색해 보기도 전에 정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상단에 굵은 글씨로 떠 있는 새 메일 제목부터 눈에 들어온 것이다.


[LOT - Important information for travellers] (폴란드 항공 - 여행객들을 위한 중요한 정보)


불안한 마음으로 클릭을 했다. 슬픈 예감은 역시 틀린 적이 없지.


예약한 출발 항공편 스케줄이 없어졌다는 메일이었다.



1) <부모님 여행 10 계명>

자녀들과 함께 해외여행 갈 때, 부모님께 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말들. 우스갯소리이지만, 많은 자녀들의 진심이 담겨있다.


1. 아직 멀었냐 금지

2. 음식이 달다 금지

3. 음식이 짜다 금지

4. 겨우 이거 보러 왔냐 금지

5. 조식 이게 다냐 금지

6. 돈 아깝다 금지

7. 이 돈이면 집에서 해 먹는 게 낫다 금지

8. 이거 무슨 맛으로 먹냐 금지

9. 이거 한국 돈으로 얼마냐 금지

10. 물이 제일 맛있다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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