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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Oct 25. 2024

슬픈 예감은 왜 끝나지를 않는가

기차, 너마저

'네가 예약한 항공편은 없어졌으니, 다음날 떠나렴.'

항공사가 이렇게나 무책임할 수 있나.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4월 초 당시 항공권을 검색했을 때,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느껴졌던 것은 폴란드 항공이었다. 추석 시즌임에도 항공권 가격이 비교적 저렴해서 프리미엄 이코노미 좌석으로 예약해도 큰 부담이 없었고, 귀국 시에는 바르샤바 경유 시간도 꽤 길어서 시내 구경을 하고 올 수도 있었다. 폴란드 역시 이번 여행의 후보지 중 하나였고, 바르샤바 역시 꼭 다시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경유지도 마음에 들었다.


오래 고민할수록 항공권 금액은 계속 오를 테고, 자리마저 없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항공권을 발견한 다음날 바로 구입했다. 그런데 급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원화로 결제를 하고 말았다. 하필 원화 결제 차단이 안 되어있는 카드를 쓴 탓이었다. 고액의 수수료 폭탄을 맞을까 봐 서둘러 고객센터에 연락했더니, 결제 후 24시간 내에 취소하면 수수료가 붙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얼른 취소 후 현지 통화로 결제를 했다. 금방 해결되어 다행이었다. 정신없는 일을 한 번 겪고 나니, 이제 다 됐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나름대로 액땜했다고 생각했다. 고작 그런 걸로.



항공권 구입 후 2달 가까이 지난 5월 말쯤, 뉴스를 하나 보게 되었다.


[신혼여행 코앞인데… 폴란드 항공 대거 결항]


어찌 된 일인가 보니, 예약한 인원이 많지 않아서 6, 7월 여름휴가기간 항공편들이 대거 결항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장 다음 달 항공권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리다니, 너무나 황당했다.


사실 항공권을 예매하고 난 후에야 나는 폴란드 항공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각 나라의 국적기들은 웬만하면 믿고 이용할 만하지만, 폴란드 항공은 그렇지 않다는 걸. 지연은 밥 먹듯이 하고, 일방적인 결항도 종종 있다고 했다. 오죽하면 폴란드 항공 (LOT)이 'Late or Tomorrow'의 약자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까. 그러니 추석연휴 항공권을 꽤나 늦게 검색했음에도 가격이 꽤 저렴했던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갑자기 결항되면 어떡하지?"

"그래도 추석인데, 사람들 여행 많이 가지 않을까?"

"그래, 괜찮겠지. 결항되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신혼여행을 취소해야 했던 남일이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더라니만… 정말 남일이 아니게 되었다. 7월 초, 우리 역시 Late or Tomorrow를 피해 가지 못했다. 우리가 출발하려고 했던 날은 금요일인데, 그날 바르샤바행 비행기가 아예 없어졌으므로 토요일에 떠나라는 무책임한 메일이 한 통 왔다.



고객센터에 결항 사유를 물으니 보험사에만 제공할 수 있는 정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만 할 뿐이었다. 탑승객한테 결항 사유조차, 그 어떤 변명조차 하지 않는 항공사라니! 고객센터 직원의 탓은 아니지만, 불만이 있으면 공식적으로 접수하라는 소리만 하니 김이 빠졌다.


'하라면 못할 줄 알고? 두고 봐라.'


나중에 수차례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항공기 점검 일정으로 인해 항공 스케줄에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나는 공식 답변을 받지 못했으니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그러려니 하고 추정할 뿐이다.


항공사에서는 필요시 무료 취소를 해준다고 했으나, 여행을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항공권 취소 후 다른 항공사로 다시 예약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다른 항공권들은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출발 두 달 전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는 폴란드 항공을 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토요일에 가는 건, 이미 길지 않은 여정을 하루 더 줄이는 일이니 불가능했다. 차라리 하루 일찍 목요일에 출발해야 했다.


"아빠, 휴가 하루 더 낼 수 있어?"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목요일 출발편의 경우, 바르샤바에서 바로 빈으로 환승할 수 있는 비행 편이 없었다. 오후 5시경 바르샤바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비엔나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니까 휴가를 하루 더 쓰면서도, 완전히 하루 일찍 도착하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약이 올랐다. 일방적인 취소 통보도 짜증 나는데, 하루 더 가는 보람도 충분치 않았다. 바르샤바 시내에 가면 이미 저녁일 테니 바르샤바를 충분히 구경할 시간도 없고, 하루 더 휴가를 쓰고 출발하는데도 비엔나를 24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니. 바르샤바에서의 숙박비만 더 드는 거라니. 나는 폴란드 항공의 정책까지 뒤져가며 항의 메시지를 접수했다. 45일이 지나도록 답이 없어서 또 접수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답장이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 또 화가 나서 한 번 더 보냈다. 답이 올 때까지 계속 보내리라.


하지만 항공사에 대한 불만과는 별개로,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추석 연휴에 여행하려면 별 수 없이 감수해야 했다. 비록 휴가를 하루 더 소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만큼 하루 더 쉬는 거니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비로소, 이제는 정말로 제대로 된 액땜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출발 5일 전, 부모님과 같이 타고 있던 차 안에서 나는 또 한 번의 괴로운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제발 그만…"


이번에는 오스트리아 철도 회사 OBB에서 온 메일이었다.


[Information update for your journey] (여정 업데이트)


다행히 기차 편이 없어졌다는 내용은 아니었고, 기차 시간이 변경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인스브루크 9시 14분 출발 - 잘츠부르크 11시 2분 도착 기차 → 7시 14분 출발 - 11시 2분 도착으로 변경'


9시 14분 기차가 2시간이나 이른 7시 14분 기차로 변경되었다는데, 도착 시간은 동일했다. 안의 내용을 잘 살펴보니, 기차선로 작업으로 인해 평소 경로가 아닌 다른 길로 우회해 운행한다는 것이었다. 인스브루크와 잘츠부르크 구간은 평소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지만, 우리는 4시간 걸려 가야 했던 것이다. 아마 OBB에서는 우리가 같은 시간에 도착할 수 있도록 기차를 변경해 준 것 같았다.


여행객들을 위한 배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원치 않았다. 인스브루크에서 묵게 될 호텔은,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조식 제공 옵션을 선택했던 호텔이었다. (부모님께도 이미 빈과 잘츠부르크는 다소 바쁘더라도 인스브루크는 여유로울 거라고 강조하면서 써먹었던 바로 그 호텔) 인스부르크에서의 마지막날 굳이 서둘러서 여유와 조식을 포기하고 7시 14분 기차를 타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중간에 있는 8시 17분 출발 차, 혹은 늦게 도착해 잘츠부르크를 조금 바쁘게 보더라도 원래 기차로 다시 변경해 주기를 바랐다.


'이번 여행은 뭐 하나 고객센터 연락 없이 넘어가는 일이 없네',라고 생각하며 얼른 국제전화를 걸었다. 철도 회사라 그런지 주말에도 현지 시간 오전 6시부터 근무한다는 안내 방송도 나오고 신호도 갔는데, 아무리 걸어도 전화를 받는 이는 없었다.


게시판에 문의사항을 남기면 일주일 뒤에나 연락을 받을 수 있다는데, 우리는 해당 기차를 탈 날로부터 10일 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기차를 타기 전에 답변이 오지 않으면 비엔나에 머무는 동안 기차역 창구에 직접 찾아가야 했다.


귀찮지만 할 수 없지. 항공권 결항에 비하면 정말 새 발의 피조차 안 되는 일로 느껴져서, 통화가 되지 않는 고객센터는 답답했지만 마음은 빠르게 담담해졌다. 어쨌든 나는 할 수 있는 걸 다 했고, 이제는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돈이 아깝더라도 7시 14분 기차를 타면 되는 것이었다. 잘 될 거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 액땜일 거라고.


하지만,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어떤 생각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거, 다 액땜 맞겠지? 설마, 복선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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