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먹어도 외롭지 않아
나는 혼맥을 즐겼다.
결혼을 하기 전, 늦은 퇴근을 하고 집에 오는길에 편의점에 들러 좋아하던 카프리 한병과 간단한 과자를 사서 들고오면 오늘 하루 정말 잘 살았구나 하는 뿌듯함이 들어 괜시리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샤워를 마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혹은 영화를 보며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모금은 마치 반신욕을 하는듯 내몸을 따듯하게 데워 피로를 풀어주곤 했다. 사람들과 함께 갖는 술자리에서는 억지로 웃고 억지로 말하고 억지로 마셨다면 혼자 맥주를 먹는 혼맥타임은 나를 재충전시켜주는 시간이었다. 억지미소 장착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잠옷바람으로 제일 좋아하는 공간에서 즐기는 시간은 혼자있는 걸 싫어하는 나였지만 흡족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혼맥을 하고있으면 하루를 잘 마무리했다는 뿌듯함에 이어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꿈틀거리며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지난 추억에 젖어 예전 사진들을 뒤적거렸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그리워하고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보고싶어했다. 또 나의 앞날에 대한 고뇌가 이어져 스트레스를 풀려고 갖는 이 시간이 아이러니하게도 힘들어졌다. 한모금, 두모금 맥주를 들이킬때마다 쌓여가는 현실에 대한 고민과 외로움이 같이 쌓여올라갔다. 이럴때면 더이상의 감정이 들어오지 못하게 혼맥타임을 멈추어야하는데 '갬성'가득한 20대 청춘이었던 나는 자제하지 못하고 새벽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날들에 괴로워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남편과 둘이 맥주를 한잔씩 하는 날들이 늘었다. 둘다 술은 잘 못하고 맥주 한두캔 정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고 기분이 스윽 좋아지는 것이 딱 좋은 둘만의 술자리였다. 한 달에 한 번정도 남편의 귀가가 늦어질때면 나는 혼맥을 즐겨했다. 뭐 이것저것 생각은 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복잡한 생각은 1도 하지 않는다. 오늘 잘 살았구나에 대한 뿌듯함도 없고 살짝 취기가 올라가면 오던 외로움이나 괴로움등의 감정도 없다. 결혼을 하니 심신이 편안한 상태가 되었는지 별 고민없이 그냥 맥주를 즐긴다. 내일 뭘 해야하는지에 대한 계획도 없이 정말 있는 그대로 그 시간을 즐길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렇다고 고민이 없는건 아니다. 아직도 신경쓰이는 시댁의 말 한마디 한마디, 내년초에 목표해둔 이사를 위한 준비, 그리고 올해 말에 계획한 임신, 강아지, 당장 3월에 있을 이런저런 행사들 등 신경쓰고자 하면 작은것까지도 끄집어내 머리를 아프게 만들수는 있다. 하지만 이제 굳이 그러지 않는다. 몇 년 전만 해도 혼맥을 하며 이런저런 감성이란 감성은 다 끌고와 센치한척,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세상에서 제일 힘든 20대인척 했던 나는 이제 변했다. 조금 더 현실지향적이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변했다고 느낀다. 결혼이 변화의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엔 남편이 회식을 해서 늦게온다던가, 운동을가서 늦게오는 날을 은근히 기대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그런 날이면 친구와 만나 밖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요즘엔 편안하고 고요한 집에서 한잔하는 여유가 더 좋다. 혼자먹는걸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섣불리 내 심리상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이런게 좋은날도 있고 저런게 좋은날도 있는거니까.
'좋은게 좋은거지, 내일이면 생각도 안날 걱정에 지금 나의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항상 마음속에 새겨두고 편안하게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언젠가 임신을 하면 이 혼맥타임이 엄청 그리워질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