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간다. 내내 감정이 부치는 계절이었다. 무력했고 사소한 것에도 좌절감을 많이 느꼈다. 내가 우울하다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면서 힘드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우울함이 일상으로 비집고 올라오는 것을 어찌하진 못했다. 제 때 집안일을 하는 것도, 친구나 지인을 만나는 것도, 밥을 잘 챙겨먹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 길을 가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울컥 눈물이 올라왔는데 잘 울지 못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차라리 일하는 게 좋은 시기였다.
돌이켜보자면 길어도 고작 몇 주였는데, 그 기간 내내 칠성시장에서 만난 개를 잊지 못했다. 6월, 뜬장에 우두커니 엎드려 있던 개였다. 입이 까맣고 덩치가 컸다. 첫 만남에서 손을 내밀자 꼬리를 흔들며 열심히 손을 핥아줬고, 한두 시간 뒤에 다시 만났을 때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아는 체를 하던 애였다. 놔두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냥 놓고 올 수밖에 없었다. 일을 하면서 가능하면 동물들에게 정 주지 않으려 조심하는데 그 애에게는 그냥 마음이 갔다. 아, 뭔가 좀 이상하다, 라고 생각했고, 몇 일인지 지나고 나서부터는 계속 생각이 났다.
그 후로 그 애가 생각이 나면서 울컥 울고 싶었던 순간들이 참 많았다. 직장 동료들과 이야기를 할 때, 퇴근을 할 때, 샤워를 할 때, 길을 걷다가, 내 고양이들을 보다가 찔끔 울었고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내게는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살고 개는 죽었는데 무슨 이유로 우나 싶었다. 내 눈으로 그 애가 있던 뜬장에 다른 개가 엎드려 있던 것을 보지 않았나. 내 슬픔이나 충격은 그 애에게 하등 도움도 되지 않았다. 애도하거나 명복을 빌 수도 없었다. 그런 행동은 살아있는 나를 위한 행동이 아닌가. 그 애는 이미 죽었는데, 나에게는 울거나 명복을 빌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다가 심리상담을 할 기회를 얻었다. '심리상담 받아볼래?' 라는 제안을 받을 때까지는 내가 심리상담이 필요한 상태인지도 사실 잘 몰랐다. 생각해보니 내 상태가 그렇게 좋지는 못한 것 같아서 심리상담을 받게 됐다. 한시간 반 중에 한시간 이십 분을 내내 울었던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잘 우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한참을 울면서 그 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상담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 울었다. 버스를 타면서, 헬스장에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샤워를 하면서, 그리고 집에 돌아가면서, 침대에 눕는 그 순간에도. 빵빵한 풍선을 바늘로 찌르면 이렇게 되겠구나 싶었다. 다음 날은 퉁퉁 부은 얼굴로 출근을 했다. 마음이 가벼웠다.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학부생 때 얕게 공부했던 별의 별 이론들을 되새김질을 했다. 정신분석학, 병 속의 뇌, 뭐 그런 것들. 그냥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편해지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이야기하니 선생님은 우리를 하나의 책장에 비유했다. 과거의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로 남는 것이고, 그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중 고통스럽고 아픈 것들을 빼서 괜찮다고 다독이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결국 나는 그 애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라고 생각했다. 어이가 없기도 했다. 인생을 통틀어 몇 분 만나지도 않은 애가 나를 이렇게 무너뜨릴 수 있구나 싶었다.
10회차로 예정되었던 심리상담은 내 상태가 생각보다 빨리 회복되면서 8회차에서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추석 다음 주면 나의 상담이 끝난다. 상담을 하면서 나는 그 애에 대해서는 이제 그냥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다음 주에는 나를 편안하게 하는 자본을 생각하고 만드는 작업을 하기로 했는데, 막상 상담이 마지막이라고 하니 계속 그 애가 생각이 난다. 어떻게 죽었을지도 알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도 알고, 사람에게 먹히지 못한 신체부위는 쓰레기통에 버려졌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무덤 하나 없는 죽음일지라도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면 무덤이고 비석이고 뭐가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그래도 늘 동물이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는 이야기, 죽은 가족을 마중나온다는 이야기는 나도 좋아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세상이 있다면 그 애는 누구를 기다릴까. 혹시 그런 세상이 있다면 그 애는 개친구들이 가족을 만나는 모습을 부러워하지는 않을까. 걔는 처음 만난 내게도 꼬리를 흔들어주고 활짝 반겨줬던 애인데. 사후세계가 있고 언젠가 내가 죽게 된다면 나의 털동생들과 더불어 그 애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그 애가 개로 다시 태어난다면 그 때는 나의 반려견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이제서야 그냥 겨우 그 애의 명복을 빈다. 그 애가 이제는 내내 안녕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