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줬으면 그만이지 - 김주완

참 어른이란

by 세잇

어른이라는 말의 무게

어릴 적 참 싫었던 별명 중 하나. 애늙은이. 어른들이 붙여주신 별명인데, 속이 깊다거나 의젓하다거나 어른스럽다의 순화된 의미로 그리 부르셨던 듯하다. 꼭 그렇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언제부터 어른이라는 단어를 쉬이 쓰게 되었을까.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쉽게 어른이라 부를 수 없고, 오래 살아왔다고 해서 자동으로 존경이 붙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어른이라 부르기 위해서는 그 삶 전체를 낯빛처럼 들여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뗄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결핍한 존재가 진짜 어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가운데 작년 초에 만났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한 편. 《어른 김장하》. 문장도 아니고 설명도 없었지만 사람의 이름 앞에 어른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더라. 뭔가 싶어 봤지. 다큐멘터리를 워낙 좋아하니까. 이 다큐멘터리는 결국 어른이라는 단어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삶을 따라가며, 그 사람을 어른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를 하나하나 보여주겠다는 조용한 다짐.


다큐멘터리의 여운이 잊히지 않는 와중이었는데, 최근에 책으로 다시 만났다. 경남 지역 언론인이자 기자이신 김주완 님의 『줬으면 그만이지』. 김장하 선생의 뒷모습을 잡은 표지는 단조로웠고 제목은 툭 던지듯 무심했지만, 그 속엔 10년 넘게 한 사람을 추적하며 기록한 시간들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와는 또 다른 밀도의 진실이 그 안에 있더라. 카메라 대신 펜으로, 말 대신 침묵으로 채워진 참 어른의 삶.


나는 이 두 기록 사이에서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 글은 그 사이를 오가며 내가 받은 울림과 물음을 되새기고, 나름의 방식으로 기록을 덧대보는 시도일지 모르겠다. 김장하라는 사람을 통해, 우리는 다시 어른을 말할 수 있기를.



줬으면 그만이지 - 기대하지 않는 베풂

줬으면 그만이지. 뭘 칭찬을 되돌려 받겠다는 것이오?


어떤 말보다 단호하고, 어떤 철학보다 간결하다. 김장하 선생이 소개한 한 거지의 에피소드인데, 선생의 삶을 통째로 압축해 보여준다. 무언가를 베푼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그 행위를 쉽게 선행이라 부르지만, 그의 태도는 선행조차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냥 당연한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마음.


기부란 뭐고 나눔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종종 베푸는 행위를 하면서도 의미나 반응을 기대한다. 그것이 당장 감사의 말이든 혹은 칭찬이든 혹은 언젠가 돌려받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심리든 말이다. 그렇게 보면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는 해야 할 것 아니오?'라는 말엔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행동을 조건과 기대 속에서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기대에 김장하 선생은 무심히 선을 그었다. '줬으면 그만이지.' 그 말에는 진심의 무게가 담겨 있다.


40대의 젊은 나이에 명신고를 만들고 10년 넘게 이사장으로 계시다가 학교를 사회에 내놓으신 김장하 선생. 본인이 가난으로 인해 배우지 못했음이 안타까워, 같은 이유로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많은 학생들을 장학금으로 도우시더라. 김장하 장학회에서 지원을 받은 어느 학생은 '저는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내가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이보다 더 분명한 가치관이 있을까. 김장하 선생에게 베풂이란 성과를 기대하는 일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몫을 다하며 살아가도록 조용히 밀어주는 일이었다. 기대하지 않기에 실망도 없고, 실망하지 않기에 또 미워할 일도 없는.


선생은 말보다 실천으로 보여주셨다. 자신의 직업이자 생업인 약방의 수익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라며, '나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라고 했다. 어떤 명분도, 계산도 없었다. 다만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덜 아픈 자리를 남기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단단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아무 기대 없이 베풀고, 아무 대가 없이 살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어쩌면 그의 삶 전체에 있다. 그는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라고 했다.


참된 어른은 자신이 심은 나무가 자라는 걸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물을 주고 그늘을 만들어줄 뿐이다.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말은 그래서 무심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엔 깊은 책임과 윤리가 숨어 있다. 내가 한 행동을 나 스스로 감당하고, 거기서 멈추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의 방식 아닐까. 그 말 하나로 김장하 선생을 어른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명예보다 일상 – 약방을 비울 수 없어서

국가가 수여하는 훈장, 그것도 대통령이 직접 주는 국민훈장 모란장. 보통 사람들이라면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요, 감사 인사부터 기념사진까지 잔치처럼 치러질 만한 순간이다. 그런데 김장하 선생은 그 전수식 참석을 거부했다.


그 이유가 뭐였냐면, 약방을 비울 수 없어서.


이 한마디는 실로 기이하고, 또 기념비적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훈장이 권위이고, 업적의 증명이고, 살아온 시간에 대한 인정일 수 있다. 하지만 김장하 선생에게는 당장 자리를 비우는 게 더 큰 문제였나 보다. 누군가의 병을 듣고 약을 지어주는 일, 소문을 듣고 먼 길 찾아오는 손님의 말벗이 되는 일이 더 중요했나 보다. 훈장보다 일상, 명예보다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경남교육청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내 목이 날아간다며 교육감이 사정사정했다나. 이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된단다.


김장하 선생은 그 순간에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삶이란 결국 자리를 지키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선택 앞에서도,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놓지 않는 일. 그것이 설령 많은 이들이 아까워할 훈장이라 할지라도.


생각해 보면 명예란 늘 외부에서 붙여주는 이름표 같은 것이지만, 일상은 오롯이 자기 손으로 짓는 집과 같다. 김장하 선생은 그 집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중시한 약방은 단지 약을 짓는 공간이 아니었다. 지역 주민의 안부가 오가고, 아픈 이들에게 말 한마디를 더 건네는 곳이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을 선생이 아닌 이웃으로 살았다. 훈장이 아무리 빛나도 그 하루의 삶이 더 값지다 여기신 것이겠지.


우리는 종종 더 나은 자리를 향해 애쓴다. 부와 명예, 인정, 영향력. 그러나 그 자리가 나를 밀어낸다면, 진짜 손해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끝까지 머무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른의 방식 아닐까.



무재칠시 - 가진 것 없어도 어른일 수 있다

우리는 나눔을 생각할 때, 내가 가진 것 중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부터 고민한다. 그래서 나눔은 가진 게 많은 자들이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돈, 물건, 시간, 재능 같은.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없다면? 가진 게 없으면 베풀 수도 없는 걸까?


김장하 선생은 그런 물음에 오래전부터 대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소개한 개념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무재칠시(無財七施)’라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글자 그대로, 재물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베풂인데, 화안시(和顔施), 자안시(慈眼施), 언사시(言辭施), 심려시(心慮施), 사신시(捨身施), 상좌시(床坐施), 방사시(房舍施) 라고 한다.


그게 뭐냐면, 첫째가 화안시(和顔施)라는 겁니다. 얼굴빛을 환하게 해서 상대를 대할 때 이것도 큰 봉사라는 것이죠. 둘째는 자안시(慈眼施), 눈빛을 편하고 부드럽게 해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도 큰 봉사라는 겁니다. 이건 재산이 없어도 되거든요. 그다음에 언사시(言辭施), 말씨를 부드럽게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크나큰 봉사입니다. 그다음에 심려시(心慮施)라고 하죠. 마음 씀씀이입니다. 서로가 마음과 마음을 위로해 주는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다음에 사신시(捨身施)라고 하지요. 결국 몸으로 때우는 겁니다.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걸 보면 좀 들어주고, 얼마든지 몸으로 때울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상좌시(床坐施), 자리를 양보하는 일입니다. 자리 양보하는 일은 큰돈 안 들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마지막으로 방사시(房舍施)입니다. 요즘 와서는 그런 일이 좀 적겠습니다만, 그래도 방을 빌려줄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나그네가 많이 다닐 때 그 나그네가 집 떠나서 어느 헛간에라도 좀 재워 달라 할 때 방에 재워주는 것, 이것은 정말로 엄청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일곱 가지를 무재칠시라 그럽니다.


처음엔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다. 얼굴을 환하게, 눈빛을 따뜻하게, 말씨를 부드럽게 등등. 이게 진짜 베풂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김장하 선생의 삶을 곱씹다 보면 알게 된다. 선생이 정말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그는 누구에게든 정중했고, 말수가 적지만 필요한 말은 꼭 했다. 바쁘고 피곤할 때조차 약을 지러 오는 사람 앞에서 인상을 쓰지 않았다. 모임 자리에선 늘 먼저 일어났고 기꺼이 자신의 공간을 열어두었다. 그는 큰소리 없이 몸을 앞세우거나 젠체하지 않고, 그 대신 눈빛과 표정, 말씨와 태도로 세상을 대했다.


그 삶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이런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어른이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


그 말에 답이 있다. 애정이 본디 인간의 바탕이라면, 어른은 그 바탕을 가장 고요하고 자연스럽게 실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재칠시는 그래서 어려운 말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쉬운 나눔이다.


돈이 없어도, 시간이 부족해도, 피곤한 날에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부드러운 말, 따뜻한 시선, 잠깐의 자리를 내어 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조차 하지 못한 채 내가 풍족하지 않기에 줄 수 없다 한다. 김장하 선생은 베풂이란 결국 태도의 문제라는 것, 그런 삶의 태도에 조용히 이의를 제기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실천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군가를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가.



김장하 바이러스 - 조용한 전염, 조용한 유산

사람 하나의 이름이 이렇게 오래, 그리고 깊게 전해지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도 소리 없이, 자랑 없이, 억지로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김장하 선생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마치 전염병처럼 번진다. 누군가를 직접 만난 사람만이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이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 그가 한 일을 곁에서 지켜본 이들 사이로 조용히 퍼져간다.


김주완 기자는 이 현상을 가리켜 이렇게 썼다.


등장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이미 ‘김장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많았다.


그건 아마도 김장하라는 사람이 말보다 삶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누군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고 자신이 옳다고 뭔가를 주장한 적도 거의 없다. 대신 본인이 옳다고 믿는 공평이라는 방식대로 살았을 뿐이다.


그는 특출한 성공이나 유명한 제자, 결과로 평가받는 세상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응시한 건 그저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 내세울 이름은 없어도 지킬 것을 지키며 하루를 통과하는 사람들. 그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삶이 어른스러움의 본질이라고 믿은 듯하다.



어른은 - 지켜야 할 마음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사람

돌아보면,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며 줄곧 한 사람을 말해왔지만 사실은 한 사람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김장하라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어른의 표정을 떠올리고 싶었다.


어른이라는 말이 너무 가볍게 쓰이거나, 반대로 너무 무거워 아무도 쓰지 못하는 시대. 그 속에서 진짜 어른은 어떤 사람인가 묻고 싶었다.


어른은 단지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지켜야 할 마음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사람이다.
그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영향력이고, 훈계가 아니라 울림이지 않을까.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마음을 건네고 있는가.
나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어른이라 불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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