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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ㄴㅈㅇ May 29. 2017

달은 6펜스의 세계에 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홍상수와 김민희


  2016년 한국 영화계에서 이 둘의 사생활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사건이 또 있을까요. 한 언론매체의 보도를 통해 밝혀진 두 사람의 불륜 행각은 순식간에 대중에게 퍼졌고 평생 들어도 넘칠 만큼의 욕을 듣게 되었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둘은 오랫동안 작업을 같이 하면서 서로에게 마음을 품게 되어 공공연하게 연애를 이어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불륜을 기독교의 7대 죄악보다 더 심한 패륜으로 생각하는지라 이들의 처신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상에는 저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홍상수’의 ‘홍’만 나와도 그를 비판하는 댓글이 무지하게 쏟아졌습니다. 신랄한 표현으로 그들의 조상님을 찾거나, 혹은 곤장으로 죄인을 내려치듯 조리돌림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올해 2월 베를린 영화제에서 홍상수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작품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둘의 관계는 다시 한 번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영화의 줄거리가 홍상수와 김민희의 불륜을 미화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인데, 덕분에 정의감에 불타는 인터넷 포청천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홍상수와 김민희에게 작두를 내리곤 했습니다.


명쾌함이 솔로몬급

 

  수많은 댓글들이 홍상수와 김민희의 뻔뻔스러움을 질타하고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들을 옹호하는 댓글도 제법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홍감독의 경험이 있었기에 작품을 만들 수 있었고, 덕분에 우리도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거 아니냐’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리고 ‘감독 본인이 불륜남이라는 리스크를 정면으로 맞으면서 가겠다는데, 타인이 어떤 도덕적 잣대로 그를 꾸짖을 수 있는가‘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물론 예술가의 개인적 삶과 그가 만든 작품에 대한 평가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술 작품이 훌륭하다면,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의 삶 또한 훌륭하다’라는 논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은 예술 작품이고, 예술가는 예술가였습니다. 아무리 세기의 걸작을 만들어낸들 예술가의 삶 자체는 ‘예술’의 지위를 떼어내고 자연인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이런 생각을 댓글로 표현하려 했지만 왠지 작두를 내리는 또 다른 포청천이 되는 것 같아 그만두었는데, 하지만 오늘 소개할 책을 읽으면서 홍상수와 김민희의 불륜을 옹호하는 댓글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예술가와 예술 작품 간의 관계, 서로가 서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 이 책은, 제목이 인상적인 책으로도 유명합니다. 작두를 내리는 대신 한껏 고민이 담긴 독후감으로 대신합니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소개합니다.



아침드라마 김치싸대기 같은 스트릭랜드의 기행


  사실 『달과 6펜스』는 ‘과연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속하는 작품인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줄거리가 단순합니다. 어느 날 런던의 한 중산층 가장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충동적 결심을 하고선 가출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그림을 그리는데 쏟습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게 전부입니다. 플롯의 변곡점이나 인물 간의 갈등이 세밀하게 묘사되지 않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직선적이고 일방통행입니다. 이는 구성이 치밀하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스트릭랜드의 기행을 쫓아가기만 하면 되는, 막장 조미료를 더한 아침드라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이 소설의 시점은 1인칭 관찰자 시점입니다. 얼핏 읽어 내려가기에 관찰자인 ‘나’가 지근거리에서 스트릭랜드를 관찰하고 묘사하는 방식이라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문득문득 화자의 생각을 통해서, 혹은 스트로브나 주변 인물들의 생각을 통해서 저자인 서머싯 몸의 예술가에 대한 입장을 드러냅니다. 초반부에 ‘예술가의 기행은 예술 작품을 위한 필요조건임’이라는 듯한 문구로 저자의 생각을 밝히는데, 사실 스트릭랜드가 등장하진 않았지만 이 부분에서부터 소설의 첫 단추는 꿰어졌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의견으로는, 예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예술가의 개성이 아닐까 한다. 개성이 특이하다면 나는 천 가지 결점도 기꺼이 다 용서해 주고 싶다.  - 9p


아무리 예수라도 스트릭랜드는 용서하지 않을 것 같다


  화자의 바램(?)대로 스트릭랜드는 ‘천 가지 결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향점인 예술을 위해 스트로브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픔을 안긴다거나, 블란치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녀가 어떻게 되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거나,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구해주어도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는 것 자체가 분하다는 태도(135p)’를 보이는 인간입니다. 아주 ‘인간 말종에 이런 말종이 있나’할 정도로 주변 사람들을 가혹하게 대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이 망가져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는 예술에 심취한 것을 넘어서 스스로 예술을 위한 도구가 되고자 한 광기어린 사람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보고 나면 어쩐지 스트릭랜드가 악당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여러 서평을 검색해 봐도 스트릭랜드를 비판적으로 쓴 글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악당이라기보다 ‘세기의 천재’, ‘불굴의 열정’ 이라는 단어가 더 자주 쓰입니다. 스트릭랜드는 예술을 추구하는 삶에 도취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인물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기적이고 구제불능의 악당임이 틀림없는데 왜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기 어려울까요. 왜 스트릭랜드를 ‘6펜스의 세계에서 벗어나 달의 세계를 추구한 위대한 예술가’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화자인 ‘나’와 스트로브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스트릭랜드를 평가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트릭랜드가 그토록 많은 패륜을 저질렀음에도 그를 비판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소설에 등장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트릭랜드를 추켜 세우기 때문입니다. 스트릭랜드의 비도덕성과 무책임함은 주변 인물들의 극찬을 통해 예술적 지위로 용인되고, 오히려 ‘천재’라는 이름으로 포장됩니다. 그의 방탕함과 안일함은 희대의 예술가로서 가져야 할 ‘개성’이기에 처음부터 가치판단에서 제외된 것처럼 보이며 오히려 미화되는데, 이러한 주변 인물들의 생각은 곧 저자의 생각입니다.


「여보, 그 사람은 천재라니까. 당신은 설마 나를 천재로 생각지는 않겠지. 나도 내가 천재였으면 좋겠어. 천재를 볼 줄은 알지. 천재를 정말 진심으로 존경해. 세상에서 천재보다 굉장한 건 없어. 천재들에게야 그게 큰 부담이 되지만 말야. 천재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해 주고 참을성 있게 대해 주어야 해」-130p


어이구. 천재 나셨어요


  그렇다면 저자가 의도하는 것처럼 천재적인 예술가는 6펜스 세계의 윤리와 도덕을 넘어선 ‘제 3지대’에 존재하는 사람인가요. 사실 예술은 인간에게 심미적 만족감을 제공하는 ‘그 무언가’임이 틀림없습니다. 나아가 예술은 작품을 접하는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창작하는 예술가에게도, 주변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하지만 소설 전반에 걸쳐 스트릭랜드의 포악한 성격을 개성이라는 단어로 일관되게 표현하는 것은 저자의 지나친 예술지향주의로 보입니다. 구체적인 동기도, 고민도 제시하지 않은 채 한순간 충동에 사로잡혀버린 주인공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나아가 작품 해설에서도 달의 세계와 6펜스의 세계를 비교하면서 스트릭랜드를 한껏 추켜세우는데, 따지고 보면 소설의 시작도 6펜스의 사회에서 스트릭랜드의 예술이 재평가되면서부터 시작되지 않나요. 즉 달과 6펜스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상호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때 진정으로 위대한 예술이자 예술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심지어 이 책은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삼았는데, 실제 고갱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고서 가족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고갱이 죄책감 때문에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던 인물임을 고려한다면 자신의 예술 추구를 위해 극단으로 치달았던 스트릭랜드를 고갱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요.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이 마약 한 다발을 들이마신 채로 걸리적거리는 것을 몽땅 부셔버리거나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자신까지 파괴의 길을 걷는 것이라면, 그 이후에 세기의 걸작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면 스트릭랜드는 분명 훌륭한 예술가입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약쟁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현실을 인식하는 사람이자 6펜스의 세계 위에서 달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누구보다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책임을 수반하지 않는 자유를 극단으로 추구하는 스트릭랜드의 행동이, 브레이크 없는 그의 직진이 자칫 멋있고 폼 나게 보일 수는 있을지라도 어디까지나 약에 취한 채 널브러진 약쟁이의 모습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저자가 그려낸 것은 예술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찬 주인공의 모습이지만 그 뒤에 방탕하고 비도덕적인 삶을 개성이라 치부하는 것은 예술가에 대한 기만입니다. 예술을 논함에 있어 미적 가치와 예술가의 정열적인 충동은 예술 작품을 위한 필요조건인지도 모르지만 그 자체가 모든 것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총평 달은 6펜스의 세계에 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


  스트릭랜드의 삶을 현실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삶이 진정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꿔 말하자면 홍상수와 김민희를 보았을 때 그들의 삶이 영화에서처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술가 혹은 예술 작품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매혹적인 아우라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일반적인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이들에게 적용시키기 주저했던게 아닌가요. 일반인들의 기행이란 감옥에 가는 필요조건이지만 예술가들의 기행은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임을 무의식적으로 용인해왔던건 아닌가요. 그래서 고흐와 같은 화가의 작품에 값이 더 매겨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술 창작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몰입하여 현실을 도외시 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해가 된다면, 결코 그 예술가의 삶이 위대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한껏 흥이 오른 약쟁이에 불과합니다.


  홍상수의 작품은 분명 대단합니다. 대중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만의 색깔과 언어를 담는 작품을 꾸준히 찍어내고 있습니다. 저도 홍감독의 작품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그의 작품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가 개인적으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모두 긍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가에 들이대는 윤리, 도덕의 잣대는 일반인의 그것과 같아야만 합니다. 홍상수는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그가 저지른 행동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지 못할지라도 말이죠.          


네. 부디 다음 생에는 역지사지로 당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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