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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ㄴㅈㅇ Feb 27. 2018

운명의 폭력성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

운명(destiny)’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으신가요?


우리가 보통 ‘운명’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로맨틱하게 말할 때 주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영화 「접속」에서 ‘만나야 될 사람은 언젠가 만난다’라는 대사처럼 너와 내가 운명으로 묶인 사이니 헤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는데, 이럴 땐 ‘운명’이라는 말은 참 로맨틱하게 들리죠.


그렇다면 운명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있으신가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피할 수 없음’이라는 말은 끔찍한 말입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으며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일방성의 폭력.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결국 정해진 결론으로 수렴한다는 직선적인 운명의 본질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가혹하리라 할 만큼 억압으로 느껴집니다.


그렇게 본다면 영화 「터미네이터」는 ‘세상의 멸망’이라는 운명에 대항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리즈를 통틀어 운명에 대항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그중 몇 명이 희생당하기도 합니다. 3편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인공인 존 코너의 엄마, 사라코너는 자신의 묘비명에 ‘No fate not what we make(운명이란 없다. 우리가 만들어갈 뿐)’이라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4편에서는 결국 세상이 멸망하여 밑바닥부터 희망을 되찾는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게 되죠. 이처럼 운명은 제법 로맨틱한 순간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 절대성과 일방성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개념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어느 날 사냥을 하던 모스가 돈 가방을 손에 넣으면서 살인청부업자인 쉬거에게 쫓기게 됩니다. 그리고 보안관인 벨은 모스를 보호하고 쉬거를 체포하고자 이 둘의 발자취를 뒤쫓는 것이 줄거리의 전부입니다. 플롯 구성으로만 보면 여느 스릴러 영화와 다를 바 없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서사적 구성을 강조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캐릭터 영화처럼 보입니다. 배경음악이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심지어 주요 인물이 같은 화면에 등장하는 장면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긴장감을 끌어내고 극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은 영화가 세 인물에게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춘, 캐릭터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일 일 것입니다.


극 중에서 사이코패스 킬러로 분하는 안톤 쉬거는 ‘운명’을 상징하는 존재처럼 묘사니다. 그는 자신만의 목적과 원칙을 가졌으며 그 기준에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영화 초반 주유소 장면이 그의 캐릭터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쉬거는 주유소 편의점 주인과 대화를 하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동전 던지기 게임을 제안합니다. 그러면서 이 동전이 이곳에 오기 위해서 22년간 여행을 했고, 지금 당신 앞에서 앞면이냐 뒷면이냐를 묻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동전이 여기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이 동전은 너를 심판하기 위해서 왔으며, 그것은 당신이 받아들여야 할 필연적인 운명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동전은 우연히 던져집니다. 주유소 주인은 앞, 뒷면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앞면이 나오면 살고, 뒷면이 나오면 죽는다는 것은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정해진 것입니다.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공정한 게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애초에 그것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속성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쉬거의 행동과 말을 들어보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운명’이란 것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과 닮아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운명이란 놈이 불쑥 찾아와서는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는데, 내가 그 판에 끼고 싶든 아니든 휘말려 들게 됩니다. 나의 선택은 운명이 정해놓은 결과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다 왼쪽으로 건널까 오른쪽으로 건널까 선택하는 것은 나의 자유의지이지만 어느 한쪽으로 건넜을 때 교통사고가 나는 결론은 운명이 이미 정해놓았다는 거죠.


쉬거 앞에서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대사가 ‘이럴 필요 없잖아요’입니다. 하지만 쉬거는 그 말을 여러 번 듣고는 오히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가 보기에는 이미 그들의 운명이 죽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고 곧 그것이 실현될 것인데, 정해진 운명 앞에서 ‘이럴 필요 없잖아요’라고 소리치는 것이 쓸모없는 행동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죽음으로 위장한 운명은 이미 쓰나미처럼 목전에 들이닥쳤는데 그 앞에서 ‘이럴 필요 없다’라든지, ‘왜 꼭 나여야만 하는가’ 란 질문 자체가 쉬거에게는 웃긴 거죠.



극 중에서 안톤 쉬거는 신적인 인물처럼 묘사됩니다. 모스의 뒤를 쫓으며 철저하게 조사하는 모습이나, 혹은 스스로 치료하는 장면에서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를 성경 모티브를 살짝 비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모스와 비교함으로써 쉬거는 신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모스는 너무나도 허술한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쉬거와 모스는 각각 나름의 사냥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쉬거는 신이 인간에게 낙인을 찍듯 이마에 바람구멍을 만들었으나, 모스는 정교하게 노린 표적이 보기 좋게 빗나가고야 맙니다.


감독인 코엔 형제는 여기까지만 보여주면 혹시 관객들이 잘 모를까 봐 후반에는 쉬거를 쫓는 또 다른 청부업자를 등장시켜 쉬거와 모스의 캐릭터를 설명해줍니다. 극 중에서 이 캐릭터는 설명충입니다. 전개와는 관계없는 인물이라 통째로 들어내도 무방했음에도 코엔 형제는 시간을 할애하여 두 캐릭터의 차이점을 말해줍니다. 인간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는 모스와 그 반대인 쉬거의 캐릭터를 깔끔하게 정리하죠.


둘 다 똑같이 대사는 'You still hold' 입니다


새벽 첫 닭이 울기 전에 3번 부정한다는 베드로의 모티브는 「곡성」을 포함하여 여러 영화에서 즐겨 사용하는 모티브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베드로 모티브를 차용한 장면이 있습니다. 모스가 어디 있냐는 쉬거의 질문에 집주인은 당당한 표정으로 3번 부인하는데요, 3번 부인하고 나서 난데없이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떻게 보면 스토리 진행상 쓸모없는 장면인데 가만 보면 베드로 모티브를 따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쉬거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베드로 모티브를 통해 비틀어서 표현하는 것이죠. 쉬거가 모스를 찾아내려고 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도 전방에 Dodge의 엠블렘이 잠깐 등장하는데, Dodge의 엠블렘이 산양이고, 개신교에서 산양은 사탄임을 생각해본다면 곧 쉬거가 사탄과도 같은 신적인 존재로 묘사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위대한 이유는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종교를 믿으시는 분들은 ‘태초부터 모든 세계가 창조주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고 결정된다.’라고 생각하시죠. 물론 인간에게 억압처럼 보이는 가혹한 운명까지도 창조주의 안배 속에서 진행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제게 이 영화는 그러한 명제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영화처럼 보입니다. 영화의 종반부 직전까지 안톤 쉬거는 우연과 운명을 관장하는 신적인 존재에 가까웠습니다. 무질서한 세계 속에서 홀로 유아독존하는 모습이 연출되었죠. 하지만 그 시거 조차도 교통사고라는, ‘우연’이라는 질서 속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필연적이지만 굉장히 우연적인 순간에 다가오는 운명의 속성. 신과 같은 그 조차도 피하지 못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종교에 대한 코엔 형제의 대답을 들려주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운명이라는 것은 사이코패스보다 더 못된 악마입니다. 운명이란 것이 이 장면에 이르러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라며 외치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주인공인 보안관 벨을 비롯하여 이 영화에서는 주유소 사장, 택시 드라이버, 호텔 카운터 등 다양한 노인들이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노인은 인생의 경험을 몸으로 체득한 존재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는 거겠죠. 그래서 노인이 지혜의 상징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인간세상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그렇기에 노인들의 지혜는 시대를 지나도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처럼 그들의 경험, 생각, 통찰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 부지기수로 생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럴수록 그들의 능력은 발휘되지 못하고 평가절하 됩니다. 이 영화에서도 많은 수의 노인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모두 무덤덤한 모습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무기력해 보이기도 합니다.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 더 이상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체념, 그리고 그 체념이 이미 그들에겐 익숙해진 모습입니다. 아마 그러면서 노인이 되어가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젊은이와 노인의 중간쯤에 속해있는 벨은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고민합니다. 벨은 쉬거가 다녀간 자리에 앉아보기도 하며 그를 떠올려보기도 하지만, 결국 그의 모습조차 보지 못합니다. 쉴 새 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 무기력하게 늙어버린 자신을 받아들여야 하는 비참함과 무기력함을 거부해보지만 결국 세월 앞에 무릎 꿇고야 맙니다. 마지막 장면의 독백에서 더 이상 새로운 시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없다는 것을 느끼며 한없는 무기력감으로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 영화는 덮쳐오는 운명과 그 운명에 맞서는 젊음. 그리고 그것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한 노인의 깊은 탄식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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