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든짱 Apr 26. 2019

독일의 겨울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에 대한 변명

"한국 뜨고 싶다" 또는 "워홀 가고 싶다" 같은 말들을 주문처럼 외던 때가 있었다.

퇴사하고 어찌저찌 한반도가 아닌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려오면 "우와아 부럽다"라는 말이 척수에서 튀어나오던 때였다. 그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되는지는, 그리고 정확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이미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차에 남편을 만났다. 오래간 인스타에서 하트로 친목을 다져오다 오프라인으로 실재를 확인키로 하면서였다. 유학 준비 중이라는 '인친'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아니 사실 그로부터 십수 개월 전 인스타 프사에 반했던 나는 네가 유학 준비 중인 나라가 내 워홀 희망 국가 리스트 중에 있음을 강력히 어필하여 독점적 관계를 따내는 데 성공하였다. 얼마 뒤에는 어떤 변곡점을 맞이하여 아 한국 개시러 한국 뜨고 싶다라고 징징댄 끝에 거의 엎드려 절 받기로 독일에 함께 가자는 말을 받아내기까지 하였다. 연전 연승. 그렇게 모양새만 꾸려서 호다닥 식을 올리고는 워홀 막차 타고 지난해 가을의 끝자락, 구주 유럽의 덕국에 다다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그 시간동안 외던 그 공염불이 정확히 무엇을 겨냥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겨울의 독일은 마냥 어두웠다.

한밤중 계단 따라 내려선 뒤셀도르프 공항 활주로에서의 생경한 감각은 그때뿐, 그 높은 건물 없는 넓고 한적한 도로는 겨우내 가장 익숙한 풍경이었다.

10월의 끝자락에 11월을 열며 도착한 우리에게, 마중 나온 남편의 친구는 안 좋은 때 왔다며 당시만 해도 오지랖인지 싶은 소리를 건넸다. 페이스북의 재독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마치 1999년 여름의 사람들처럼 그때가 왔다는 뉘앙스의 발언들을 입에 올리고들 있었다. 왜들 이러나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다섯 시면 해가 지기 시작했고 아침에는 여덟 시가 돼도 사위는 컴컴했다. 네 번째의 '임시 집'은 간신히 남향이었지만 밤보다 낮이 짧은 그때에 나무가 우거진 정원 너머로 누릴 수 있는 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움츠러들어야만 하는 나날이었다.

우리가 지내기로 한 도시는 한때 일본인들이 일본령으로 삼자고 우스갯소리했다던 만큼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어서 아시아인들에게 좋은 선택지였다. 실제로 그러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동북아인은 그 많다는 이민자 중에서도 어쨌든 소수자여서 나는 스스로를 삼등 시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저 동양인'으로 지적받지 않도록 한껏 은신했다. 지하철에서는 1인석에만 앉고 서서 갈지언정 누군가의 곁에 앉지 않았다. 대중교통에서 남편과 대화할 때에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고 누구에게나 길을 먼저 비켰다.

간신히 쌩 초보는 면한 채 다니게 된 어학원에 나가는 길은 매일이 도전이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급우들끼리 떠드는 말을 반도 채 못 알아들어서 쉬는 시간엔 핸드폰이나 만졌고, 매일이고 찾아오는 옆 자리 급우와의 회화 시간에 누구와든 어색한 대화를 해야 할 것이 두려워 차라리 운에 짝을 맡기자며 남은 자리에 앉기 위해 가장 늦게 강의실에 들어갔다.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고 남편과는 아직 살림의 합이 맞지 않아 자꾸만 다투고,

그즈음 나는 매일 밤이면 당장 내일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비행기표를 검색하곤 했다.

어느 날엔 알이탈리아를 타면 60만 원으로 16시간 안에 인천에 다다를 수 있었고, 또 어떤 날엔 핀에어를, 어떤 날엔 중국동방항공을, 또 어떤 날엔 저가항공과 무언가를 두 번쯤 갈아타 스물몇 시간을 흘려보내면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상상만으로도 발밑이 얼마간 단단해지는 듯하곤 했다.


습한 겨울을 자랑하는 이 땅에는 매일 아침 길을 나설 때면 비가 왔었던 흔적이 흥건했다. 또는, 집으로 돌아오는 어느 길목에서건 갑작스레 비가 뿌렸다. 이는 그 짧은 볕 볼 시간 또한 비구름에 어둑해지기 일쑤였다는 것이고, 또 이는 그만큼 비타민 D도 제대로 합성해내지 못하는 채 나 또한 더없이 눅눅해져가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때는 연말, 영어도 독어도 못하는 내게 유일한 소통 창구인 SNS는 한 해를 매조짓는 정서로 가득했다. 연말이랍시고 근사한 데서 식사를 하며 연말이랍시고 지난해의 성취를 돌이키는 피드들이 가득했다. 나는 성취는 개뿔 손에 쥐고 있던 사회적 무언가랄 것들은 다 놔버리고 마트 PB 상품이나 세일 상품만 노려서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데. 친구들과 마시던 비싼 사케 친구들과 먹던 비싼 회 친구들과 가던 근사한 와인바 이런 것들이 자꾸만 마음을 헤집었다. 도대체 그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나는 여기 와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회사 다닐 때만큼 빠지지 않는 머리카락이나 더 이상 떨리지 않는 눈밑, 부러지지 않는 손톱 같은 것들은, 나 혼자 주치의라 칭하던 회사 옆 내과 선생님에게 통사정하여 타 온 한 달치 위염 약을 한 줄도 손 대지 않고 있는데도, 보통의 범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별달리 인식되지 않아서─눅눅해진 마음에 자괴감에 담뿍 젖어들어 그 무엇도 증발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생각하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왜 여기에 온 것일까. 나는 왜 그 시간들 동안 한국을 떠나고 싶었을까. 나는 왜 회사가 주는 정기적인 자금으로 유지하던 군색할 것 없던 생활을 뛰쳐나왔을까. 절충안은 없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회사도 더 다닐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제 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건 혹시 시간 낭비가 아닐까.


독일에 오고 첫 두 달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집이 잘 구해지지 않아 네 번 이사를 다녀야 했고, 그런 만큼 돈이 줄줄 새나갔으며, 분명 초등학교 때까진 영어 영재였는데 학원 친구들하고 대화하는 데에 늘 더듬대는 마음이 참담했고, 서울보다 얼마간 고위도라길래 다소간 각오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겨울이 혹독했다.

그런 때에 내가 하는 것이라곤 아침에 일어나 좁아 터진 샤워 부스 곳곳에 몸을 부딪혀가며 몸을 씻고 학원에서 더듬대다가, 집에 와 찰나의 햇볕을 쬐며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저녁 밥을 짓고 숙제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뿐인데도 하루가 가득 찼고, 그래서 더더욱 불안했다.

이건 혹시 시간 낭비가 아닐까.

아홉 시부터 일곱 시, 늦으면 열 시 열한 시 때로는 자정이 넘어서까지도 사무실을 지키다가, 그 쳇바퀴가 지겨워 주말이면 이 취미 저 취미를 잔뜩 꿰던 게 일상이었다. 막차를 놓치는 게 제맛인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와중의 길티플레저. 그랬던 자에게 이 삶은 빈틈이 너무 많아 보였다.

그럼에도 하루하루는 잊지도 않고 흘러갔다. 그 사실이 불안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또 생각만 해볼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하고 나눈 대화라곤 츄쓰 비스 모어겐(안녕 내일 봐)밖에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트램 안에서, 10센트에 전전긍긍하며 같은 건물 안 두 개의 마트 가격 비교를 하는 틈에서, 남편과 냉전하다 지겨워 혼자 카메라 들고 뛰쳐나온 라인강변에서, 질리도록 고급스러운 식사 사진만 나오는 인스타 피드에 하트를 안 누르는 소심한 저항을 하면서, 오늘은 꼭 엄마랑 전화해야지 생각하면서, 유심이 바뀌었으니 새로이 인증해야 한다는 카카오페이 대신 신용카드로 결제하느라 수 분을 흘려보내면서...

그렇게 모든 짬에서 고민한 끝에, 이 불안이 학습된 것이라는 결론으로 일단락 짓기로 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모아둔 돈이 떨어져가는 것은 정말로 불안한 일이지만, 어쨌든 학습된 불안을 잊고 싶어서 해외로 잠시간 도망나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이 때쯤이면 돈은 얼마를 모으고 인간관계는 어떠해야 하고─나를 지진아로 분류케 하는 항목들을 잊고 싶었다.


남편을 만나기 한 해쯤 전부터 워홀을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데에 가장 큰 명분은, '진로 탐색'이었다.

하던 일을 더 오래는 하지 못할 것 같은데 새로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퇴근을 하고서도 일 걱정을 하고 주말에도 집에서 일을 놓지 못하는 이 직업으로는, 다른 어떤 것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짬조차 사치였다. 서구 어느 대도시 카페 주방에서 샌드위치나 커피를 만들다 하루를 보내야만 영감이 떠오를 것 같았던 것이다. 물론 이 비효율은 내가 평범이나 간신히 이름표 삼는 일개미였기 때문이기는 한 것인데,

어떻게 먹고살지 가늠하기 위해서는 일단 먹고살던 것을 중단해야 하겠다는 이 역설이 자연스레 평행우주와도 같이 느껴지는 다른 시간대의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게 한 셈이다.

아니, 이건 사실 다소간의 허위의식이 섞인 생각이다.

사실 나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었다.

나를 소모하는 대신 인생을 헛되이 흘려보내고 싶었는데, 그냥 그것이 남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이름으로만 소식을 전하는 친구의 친구들에게도, 대학 동기들에게도, 언젠가 일을 같이 했던 이들에게도, 언젠가 같이 술을 마셨던 이들에게도, 카톡 프로필로 근황을 알게 되는 누군가에게도, 엄마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두를 신경쓰는 나 스스로에게 눈 가리고 아웅을 하고자.

그럼으로써 그 허비가 일종의 체험으로 거듭나는 어떠한 연금술을 바랐다.

한국에서였다면 고작 그 정도일 것이, 아무의 눈도 없는 곳에서 이룬다면 해외에서의 진취적인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니까.

그렇게 그럴싸한 명분을 갖고, 최대한 웅크리고 싶었다.


그 웅크림의 시간에서, 나름대로 시간을 허비하는 중이다.

간간이 읽고 싶었던 책도 있고, 간간이 한국에서는 닿기 힘들었던 어느 도시에도 방문하고, 또 간간이 사두기만 하고 보지 못했던 영화를 본다. 생각보다 그 간간이는 훨씬 더 뜸하지만. 어렸을 때 좋아하던 만화나 장르소설을 이럴 시간에 원고나 한 자 더 봐야지 하며 미룰 일이 없어서 낄낄대는 시간도 늘어났고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도 한두 편 봐볼 수도 있게 되었으며 일과에화분에 물 주기나 저장식품 만들어두기 같은 항목이 추가되었다. 그사이 나는 근미래의 내 진로로 벌써 세 개쯤을 갈아치운 상태다.

그리고 한두 달에 한 번씩 쓰던 보도자료가 없어서, 이렇게 내 이야기를 시간에 쫓기지 않고 기록할 마음이 먹어지는 때도 온다.


학습된 불안이라 여겼던 것이 사실은 완전히 학습만으로 구성되었던 것만도 아니기에 슬슬 실존을 과시하기 시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작금의 마음을 기록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변명하고 있다. 비타민 D 먹어가면서 겨울도 버텨냈다. 오랜만일 수밖에 없는 누구든지와의 연락에서 '잘 지내?'라는 데에 반사적으로 부정의 뉘앙스를 내비치게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훨씬 나은 삶 아니냐고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세먼지는 없어서 좋아'라는 말이 아직까지는 나름의 겸손이니까. 아 근데 알바 구해야 되는데.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를 처음으로 떠나보내게 되었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