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이의 풀 수 없는 갈등들
작가 유발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안’에서 인간의 갈등을 대하는 태도를 문화주의 개념으로 설명하기 위해 냉대국과 온화국 문화를 예로 들고 있다. 냉대국 사람은 어릴 때부터 갈등이 생기면 감정을 누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배운다. 화를 내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상대와 맞서기를 피하라고 교육받는다. 혼자 자기감정을 추스르고 분노를 가라앉히는 편이 낫다. 온화국 사람은 어릴 때부터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도록 교육받는다. 싸움이 휘말리면 속만 끓이지 말고 자신의 기분을 정확하게 말해 주는 것이 좋다. 이것이 다 함께 솔직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잘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가르친다. 하루만 소리 지르면 해결될 일을 그냥 두면 몇 년을 곪는다는 말이다.
여러분은 어느 나라 사람에 속하는가요?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파악하면 사람들과 관계에 갈등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다. 부모교육할 때 젊은 아내가 남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불만을 쏟아냈다. 다툼이 생기면 멈추고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남편은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집을 나가는 습관이 있다. 할 말이 있다고 잠깐 얘기 좀 하고 가라고 하면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면서 자리를 피하는 바람에 늘 아내는 혼자 할 말을 삼켜야 했다. 시어머니가 아들을 키울 때 여자랑 다툼이 생기면 맞서지 말고 피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여자와 싸워 좋을 일 없고, 싸워서 이길 수도 없으니 무조건 피했다가 감정이 가라앉은 후 말하라고 배웠다. 아들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싸울 일이 생기면 밖으로 나간다.
얼핏 듣기에 지혜로운 방법처럼 들린다. 서로 화가 나서 대화하다 언성이 높아지면 감정이 폭발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자리를 피하는 방식이 차분하고 현명한 대응처럼 여겨진다. 잠시 자리를 떠나 감정을 가라앉히는 일은 현명하다. 문제는 대화 자체를 회피하기 되면 갈등이 더 깊어진다. 상대는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깊은 불만을 갖는다.
우리나라는 냉대국 문화에 가깝다. 갈등이 생기면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혼자 감정을 추스르고 분노를 가라앉히라고 교육받는다. 다른 사람과 생기는 갈등은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문화 속에 자랐다. 그렇게 갈등을 피하다 어느 날 ‘손절’한다. 연락할 일이 있어 전화번호를 찾으면 없다. 상대에게 '손절' 당했다. '손절'할때 조용히 차단하거나 소리 없이 카톡방에서 나온다. 그래서 요즘 카톡방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나오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나도 한 해 전 가장 애정하던 톡방에서 새벽 3시에 나온 적이 있다. 정말 오랫동안 고민하다 남들 다 자는 새벽시간에 톡방을 나오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혼자 고립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한밤중이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아무도 안 보겠지’ 하고 나왔는데 아침에 남들 톡에 ‘00님이 나갔습니다’라고 떴다. 눈 가리고 아웅이란 속담이 여기 해당한다. 톡방 멤버들이 아무 말 없이 나가서 “기분 나쁘다. 예의 없다. 남아 있는 우린 뭐냐?” 하면서 불평을 했다고 한다. 무슨 뒷말을 했는지 보이지 않으니 모르겠다. 보지 않고 듣지 않을 자유를 경험했다. 그들 소리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자 세상이 정말 평화롭게 느껴졌다. 웃긴 건, 내가 주식하면 세상의 사람들 모두 주식하는 것 같고 내가 카톡방 나가고 나니 세상 사람들 대부분 고민했나 싶다. 카톡방 나가 욕을 제대로 얻어먹은 후 ‘카톡방 조용히 나가기’ 기능이 생겼다. 나만 고민한 게 아니구나. 그게 뭐라고 그렇게 고민할 일이냐 싶지만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카카오 관계자는 “대화가 뜸해졌거나 나갈 타이밍을 놓친 단톡방의 불필요한 알림으로 불편을 겪는 이용자들의 스트레스를 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한다. 진작 만들 일이지.
소속감의 욕구가 강한 덕분에 한 번 들어간 톡방에서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톡방을 나오면서 가까운 사이 ‘손절’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가짜 웃음’ ‘가짜 평화’에 익숙해 있는 나를 보게 됐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싫다고 말하는데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지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쓴다면 훨씬 행복할거다.
오랜 문화적 습관 때문에 갈등을 드러내 ‘자기표현’을 하면서 서로 오해한 부분을 풀고 상대도 이해하고 나도 이해받는 갈등해결의 과정을 경험하지 못했다. 갈등이 생기는 자체에 두려움을 느끼고 피하고 도망가는 방식으로 문제해결을 유보한다. 마음에는 갈등의 씨앗이 여전히 있는데 외면하고 안 보려고 한다. 혼자만의 불편함은 견딜 수 있지만 다툼으로 인해 생기는 감정적 고통은 겪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갈등 때문에 우리가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갈등이 생길 때 자신의 고통을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할 수 없어서 고통스럽다. 고통을 표현할 때 상대가 내 마음을 이해하고 내 고통에 마음을 써주지 않기 때문에 더 큰 감정적 상처를 받는다
결국 감정적 상처를 받을 때 도망가거나 피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대한다. 이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피해도 스트레스, 맞서도 스트레스다. 결국 상대의 고통을 귀기울여 듣고 나의 고통을 말해야 한다. 내 말하고 듣고 상대 말하고 듣고. 갈등으로 힘든 감정은 싸우지 않아 겪는 감정적 스트레스와 비교해 절대 적지 않다. 오히려 싸우지 않아 겪는 심리적 스트레스는 더 클 수 있다. 도망가지 말고 직면하자. 갈등은 풀린다는 성공경험을 더 많이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