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도'가 있지만, 결국 진정한 '도'는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글쓰기로 마음을 정리하는 방법도 그렇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글쓰기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빌려와서 읽었다.
그러다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불태울 글쓰기'. 일단 이름부터가 너무 매력적이다.
불 태울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을 마음을 먹고, 쓰는 글쓰기 방식이다.
다 쓰고 나면 미련 없이 활활 태워서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니 이런 글을 써도 될지, 이런 글을 남기면 혹시나 나중에 곤란한 일에 빠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냥 마음을 툭 털어놓고 글을 쓰면 된다. 놀랍게도 많은 작가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불태울 글'을 적고 있었다.
여기에 나도 살짝 숟가락을 얹어보자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오래전부터'생각 쏟아내기'의 달인이었다. 혹시 유용하게 사용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짧게나마 소개해 보겠다.
1. 먼저 새하얀 A4 용지를 한 장 꺼내 펼친다.
2. 술술 잘 나오는 볼펜도 하나 준비한다. ('술술 잘 나오는'에 별표 100개다)
3.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모두 꺼낸다는 마음으로 쓴다.
글씨체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시원스레 써보자
뭘 쓰냐면, 지금 나를 미치도록 짜증 나게 하는 사실, 내가 화난 이유, 당장 해야 하는 일, 아직 기일이 좀 남았지만 목 안에 가시처럼 박힌 일들을 전부 다 쓴다. 숫자를 매겨가며 일들을 쭉쭉 적다 보면, 그 숫자는 20까지 이를 때도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묘한 희열이 있다.) 다 적었으면 그 목록을 쭉 읽어본다. 그리고 이 말과 함께 이 의식을 마무리한다.
"이러니 내가 머리가 안 아프고 배겨?!"
그러면 마음이 좀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자, 그럼 이제 쏟아낸 것을 정리해야겠지? 머릿속에 들어있을 땐 뒤죽박죽이었던 생각을 이제 차례차례 정리를 해야 할 시점이다. 이걸 그대로 다시 머리에 넣었다간 머리가 터질 수도 있다.
마치 가방 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가방 속의 소지품을 전부 쏟아낸 것처럼 꺼낸 생각을 찬찬히 바라보며 진단을 한다. 중요도, 시급한 정도, 걸리는 시간, 효율적인 진행 순서.. 이때의 나는 무척이나 객관적인 태도로 일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길이 보인다. 그리고 생각보다 가뿐하게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플래너에 일들을 정리하여 옮겨 적고, 이 종이를 잘게 찢어 버리면 된다.
그. 런. 데! 여기에서 두 번째 아이러니한 사실. 가끔씩은 이 리스트가 짐이 아니라 굉장히 사랑스러운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직 명확한 답은 얻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게 해 준 존재여서 그런 것도 같고.. 치열하게 사는 나를 칭찬하고 싶은 마음 같기도 하고..'이게 날 것의 나 자체구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묘한 감정이다. 그래서 내가 마구 휘갈겨 쓴 이 목록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곱게 접어 다이어리에 끼워두기도 했다.
다시 불태울 글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미 '생각 쏟아내기'로 즐거움을 맛봤던 나는 '불태울 글'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내 마음이 활활 불타오를 때마다, 사색에 잠기게 될 때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발칙한 불태울 글을 적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싶은 날 것의 이야기들을 글로 쓰니 그 글이 곧 나였다. 때때로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글이 나오기도, 눈물 나게 소중한 글이 탄생하기도 했다.
원래 불태울 글의 취지대로 그 글을 공개할 생각은 없었지만, 꽤 마음에 드는 글을 적고 나면, 날 내보이고 싶은 가까운 사람에겐 수줍게 글의 한 단락을 읽어주기도 했다.(정말 민낯을 내보이는 일이라 생각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고맙게도 깔깔깔 웃으며 공감하는 그 웃음에, 진지하게 끄덕이는 표정에, 또 한 번 치유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열심히 생각을 쏟아내고, 불태울 글을 적는다.
혹시 지금 마음을 치유하는 글쓰기 방법을 찾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글을 쓰고 남김없이 태워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