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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플래닛 Jan 16. 2024

냉장고 정리하며 삶의 주도권 찾기

"남의 집 냉장고 함부로 여는 것 아니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하신 말씀이었는데,
그때의 나는 "왜요?"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애초에 난 남의 집 냉장고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랬던 내가 이젠 유튜브에서 남의 집 냉장고 정리 영상을 열심히 찾아보는 사람이 되었다.


유튜브 속 다른 사람의 냉장고들은 어쩜 렇게 깔끔한지, 오와 열을 맞춰서 정리되어 있는 반찬통과 음료수, 깔끔한 용기에 담겨있는 과일과 채소. 넉넉하게 남아있는 빈자리로 자아내는 여백의 미.. "내가 이렇게 살림을 똑 부러지게 잘한답니다." 하고 자랑하고 싶은 냉장고.



 하지만 내가 결혼을 한 후 얻게 된 냉장고는 정말 누가 볼까 무서운 물건이었다.
그 냉장고의 역사를 말하자면 길다. 남편이 자취시절 사용하던, 주인이 여러 명이던 양문형 냉장고는 우리의 신혼살림이 되었는데.. 그 수납력이 어마어마했다고 해야 할까.. 미지의 세계였다.

원래 주인을 알 수 없는 여러 음식과 유통기한을 넘긴 음식들로 가득 찬 냉장고는 살림쪼랩의 나에게는 넘어야만 하는 거대한 산에 버금가는 존재였다.

거기에 살림 초보인 우리를 걱정하시는 어머님의 큰손까지 더해져 우리 집 냉장고는 완전 내 통제력을 벗어나버렸다.
나는 고기를 즐겨 먹지 않고, 남편은 하루 1끼만 집에서 먹는데, 냉동고에는 각종 고기들이 꽁꽁 얼려져 있었고 또 더해져 갔다..

결혼 초, 남편과 냉장고 때문에 싸운 적도 있다. 나는 냉장고의 음식이 상해서 버려지는 것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아 당분간 장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남편은 제철의 재료를 사 와 나와 함께 이런저런 음식을 해 먹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냉장고에 음식이 가득해 내가 '장보기 금지령'을 내린 그때 남편은 4~5가지의 채소를 장을 봐왔고 나는 폭발했다.

나는 정말 잘하고 싶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언제나 신선한 재료로 요리를 할 수 있는 냉장고.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각종 식재료의 재고량.
반찬통을 열었을 때 알 수 없는 곰팡이가 까꿍하고 있는 냉장고는 정말 싫었다. 그것은 나에게 살림이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싶은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지도록 했다.


결혼을 한 후 나는 주기적으로 냉장고를 관리했다. (사실 요리는 나보다 남편이 더 잘하고 나는 냉장고 관리에 더 열심이다..) 내가 예전에 적은 핸드폰 캘린더를 보면
"냉장고 비우기 주간'
'냉장고 청소 완료'
'냉장고 비우기 가능성이 보인다'
'냉장고가 다시 찼다'
이런 메모가 가득하다.

신혼 초, 나는 냉장고에 있는 각종 식재료들을 다 정리하려면 5년쯤 걸리지 않을까. 하고 주위 사람에게 장난스레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느 정도 현실이 되고 있었다. 냉장고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싶으면 1+1 세일을 하는 만두가 들어왔고, 대용량으로 사는 것이 이득인 국밥과 밀키트가 들어왔고, 어머님 댁에서 반찬이 공수되었다.

냉장고를 깔끔히 유지하는 것은 나에겐 삶의 주도권, 통제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 같다. 내 생활을 내가 꾸려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 내가 모르게 어디선가 음식이 조금씩 상해 가는 건, 먹고 싶지도 않은 음식을 애써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난 내가 능력치를 벗어난 모든 것들을 끊었다. 냉동고에서 몇 년째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누린내 나는 고기들을 눈물을 금고 버렸고, 어머님댁에서 오는 반찬도 간곡하게 거절했다.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내가 채우고 싶은 것만 관리하기도 벅찼기 때문이다.

냉장고 정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나에게 누군가는 김치냉장고를 하나 더 사면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우리에겐 지금 냉장고도 크다. 냉장고의 수를 늘려서 겉보기만 평화로운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냉장고가 어느 정도 정상화가 된 현재,
나는 나에게 좀 더 큰 미션을 주기로 했다.

내 새해 목표 빙고엔 '냉장칸과 냉동칸을 1칸씩 비우기'가 있다. 내 목표를 보고 남편은 왜 냉장고에 빈칸을 마련해야 하는 게 중요하냐고 물었다.

"난 누군가 수박을 1통 사 와도,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한판 사 와도 전혀 걱정 없이, 문제없이 그대로 쑥 넣어서 보관할 수 있는 그런 냉장고를 만들고 싶어."

"응?"

"어떻게 하면 이걸 넣을 수 있을까. 요리조리 테트리스해야 하고, 문을 열 때마다 무언가 떨어질까 조마조마한 냉장고는 너무 싫어. 싱싱한 식재료는 마트에 충분하고, 난 조금씩 상해 가는 음식을 냉장고에 쌓기보단 필요할 때마다 신선한 음식을 사 먹을 돈을 통장에 쌓고 싶어"

나는 한 칸은 깔끔히 비어있는 냉장고를 지향하며, 나도 인생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이 와도 유연하게 잘 대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하루도 잘 정돈되고, 내 주변도 꼭 필요한 것으로만 채워졌으면 바랐던 것 같다.


지금 우리 집 냉장고는 어떠냐고?
며칠 전 우리 부부는 다시 한번 냉장고 점검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난 엄마께 영상통화를 걸어 우리 집 냉장고 안을 자랑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우습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며칠째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수시로 냉장고 문을 열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되고 있는,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식재료가 정갈하게 들어있는 냉장고. 냉장고 여는 순간이 이렇게 힐링이 될 일이냐고..

아직은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잘 굴러가고 있는 냉장고. 곧 택배로 국밥 8팩과 만두 1 봉지가 올 것이지만 그 자리를 미리 마련해두고 있는 넉넉한 인심의 냉장고.
난 지금의 우리 집 냉장고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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