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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Nov 05. 2017

발뮤다의 대모험

그렇게도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

발뮤다의 토스터와 커피 포트. 


1991년 스페인 안달루시아를 여행하던 일본 소년이 있었다. 소년이 여행을 떠나기 조금 전 그의 어머니가 하와이에서 스노클링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소년은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안달루시아에 가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의 생명보험금이 여행경비가 되었다. 그런 이유와 그런 돈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소년은 스페인어를 못 했다. 돈도 별로 없었다. 버스로 움직이고 유스호스텔에서 잤다. 편안할 리 없었다.


소년은 어느 날 론다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말라가에서 출발한 버스를 한 나절이나 타고 내려서 한 시간쯤 걸어서 시내로 내려온 참이었다. 소년은 지쳤고 외로웠고 배가 고팠다. 인생의 3중고와도 같은 감정에 휘말린 소년은 어떤 냄새를 맡았다. 갓 구운 빵의 향기였다. 녹인 버터가 밀가루와 엉겨붙어 구워졌을 때 사방으로 퍼지는 그 냄새. 소년은 향기에 빨려들듯 빵집으로 갔다. “얼마에요?”라는 말도 몰라서 겨우 동전을 주고 빵을 받았다. 겨우 작은 빵을 받아 한 입 넣은 순간 소년은 눈물을 흘렸다.


24년 후. 소년은 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가 되었다. 그는 2015년 도쿄에서 토스터를 발표하며 이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의 이름은 발뮤다, 소년의 이름은 테라오 겐이다.


발뮤다라는 브랜드를 이해하기 위해 저 에피소드는 무척 중요하다. 론다 빵 이야기에서는 확실한 교훈이 있다. 1)소년은 남다른 감각을 가졌다. 아무리 배고팠다고 해도 소년은 빵을 먹고 울 정도로 감각이 예민하다. 2)뛰어난 기억력으로 그때의 기분 좋은 느낌을 재현한다. 24년 전에 빵 먹고 울었던 경험을 떠올릴 정도로 소년은 기억력이 좋다. 요약하면 이렇다. 기분 좋은 감각을 저장해두었다가 기술이 들어간 기계를 통해 그때의 쾌감을 재현한다. 지금 발뮤다라는 회사가 가전 세계에서 성공한 비결이다.


발뮤다는 일본의 가전제품 회사다. 2003년 3월 창립했다. 창립 14년을 맞은 지금은 (2017년 5월 홈페이지 기준) 9종의 물건과 어플리케이션 1개를 만든다. 지금 생산하는 제품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노트북 거치대 X-베이스, LED 스탠드 에어라인, 난방기기 스마트히터, 공기청정기 에어엔진, 가습기 레인, 에어 서큘레이터 그린팬 서큐, 선풍기 그린팬, 전기주전자 발뮤다 더 포트, 토스터 발뮤다 더 토스터, 전기밥솥 발뮤다 더 고한. 


이 라인업은 발뮤다라는 브랜드의 성장과 발전을 보여주는 지층과도 같다. 테라오 겐이 직원 3명 규모로 시작한 발뮤다는 몇 가지 위기와 기회를 거쳐 직원 50명 규모와 자체 사옥과 해외 판매망을 가진 회사로 성장했다. 이 과정은 발뮤다가 외적으로 성장한 과정인 동시에 세계관이라는 무형의 요소가 성장한 과정이기도 하다. 말이 쉽지 회사 규모와 생산 제품과 세계관까지 바꾼다는 건 새로운 회사가 되었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사이에서도 발뮤다는 기묘할 정도의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 일관성은 어디서 올까? 테라오 겐의 감각이다. 빵을 먹고 눈물을 흘린 그 예민한 감각.


테라오 겐의 감각은 예나 지금이나 발뮤다에서 아주 중요한 판단의 근거다. “최종 판단은 대부분 감각에 의존해 내립니다” 일본 <닛케이디자인>에서 낸 <0.1mm의 혁신>에서 테라오 겐이 직접 한 말이다. 점쟁이에게 회사의 운명을 점지한다는 말처럼 허황되게 들린다. 하지만 테라오 겐은 확고하다. 그는 ‘감각은 노력을 통해 단련된다’고 하며 감각 훈련법까지 공개한다. 좀 길지만 아래에 인용한다.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고 느낄 때면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봅니다. (중략) 간식의 맛과 냄새, 나무의 향과 잎사귀의 바스락거림, 거리의 소음과 하늘을 나는 비행기 소리,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촉… (중략) 기분 좋은 감각을 몸의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느꼈고, 또 그때의 감촉은 어땠는지 하나하나 분석하며 머릿속에 입력해요.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점차 감각이 예민하게 단련됩니다.”


테라오 겐과 발뮤다가 처음부터 이렇게 확고한 방향성을 가졌던 건 아니다. 예민한 감각만큼이나 중요한 발뮤다의 본질이 하나 더 있다. 끊임없이 개선하고 보완하는 융통성. 여기서의 개선은 단순히 제품의 개선이 아니다. 점차 커지는 조직의 개선이기도, 브랜드의 세계관과 목표의 개선이기도 하다. 날카로운 감각과 뛰어난 융통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지금의 발뮤다를 잉태한 난자와 정자다. 


X-베이스. 발뮤다의 첫 제품. 타협하지 않은 티가 난다. 


발뮤다의 첫 제품은 맥북에 잘 어울리는 노트북 거치대 X-베이스였다. 물건의 출발점은 역시 테라오 겐의 확고한 취향과 감각이었다. ‘내가 사고 싶어 하는 것’에서 시작해 “멋지고 기능적인 형태를 만들고 싶었습니다”라고 테라오 겐은 그 물건을 회상했다. 실로 그런 물건이었다. 8mm 두께의 두툼한 알루미늄을 깎아 만들어 조형미와 소재의 멋이 돋보였다. 그는 맥 커뮤니티를 통해 X-베이스를 홍보했다. 질 좋고 가격이 조금 비싼 물건을 만들고, 돈을 쓸 만한 사람에게 판매하는 니치 럭셔리 전략이었다. 훌륭한 발상이다. 하지만 지금의 발뮤다처럼 많은 사람을 위한 물건은 아니었다.


초기 발뮤다의 물건은 대체로 탁상용 니치 럭셔리였다. 2003년부터 2009년까지 발뮤다가 만든 제품은 다음과 같다. 케이블 정리 도구, 학용품 트레이, 북엔드, 다른 노트북 거치대, 워크테이블. 이때까지만 해도 발뮤다의 포지션은 벨킨과 트로이카의 혼합에 가까웠다. 직원 수도 적고 매출도 고만고만했다. 테라오 겐의 DNA와도 같은 예민한 감각만 선명했다. 


소규모 니치 럭셔리 브랜드는 날카로운 감각과 장인적인 고집으로도 어느 정도의 생존은 할 수 있다. 다만 이 생존에는 전제가 따른다. 개인의 가처분소득. 사람들의 마음과 잔고에 여유가 있어야 무명 브랜드의 고품질 컬트풍 알루미늄 노트북 스탠드 같은 걸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유가 줄어들면 없어도 되는 사치스러운 주변기기에 쓸 예산도 사라진다. 초기 발뮤다에게 정확히 그런 일이 일어났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따른 세계 금융 위기가 직원 3명짜리 발뮤다까지 덮쳤다. 주문이 끊기고 회사가 망할 위기에 놓였다.


생명의 탄생은 신비롭고 뭔가가 결정되는 결정적인 요소는 우연이다. 정자와 난자가 착상해 수정란이 될 때도 가장 먼저 도착한 정자는 난자의 산 성분 때문에 죽어버린다. 난자와 수정하는 정자는 적당한 시점에 마침 그곳에 있던 정자다. 테라오 겐은 회사가 망하냐 마냐 하는 그 상황에서 생명이 잉태하는 순간처럼 신비로운 결정을 내린다. ‘어차피 망할 거라면 진짜 해보고 싶던 제품이라도 만들어보고 끝내자’ 그게 발뮤다를 제 2의 출발선상에 놓은 그린팬이다. 


앞에 적었듯 그린팬의 개발 배경은 시장조사를 통한 결과 도출이 아니었다. 기왕 망할 거 이거 해보고 시원하게 망하자는 객기였다. 다만 그 객기 뒤에는 일련의 논리가 있었다. 테라오 겐은 성공한 기업은 시대의 흐름을 탔다는 명제에서 출발했다. 시대의 흐름을 탔다는 건 무엇일까? “어떤 좁은 범위의 상품 혹은 서비스 분야에 대량의 수요가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재빠르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테라오 겐은 이 깨달음에서 출발해 지구 온난화와 재생 에너지 개발이라는 화두를 찾았다. ‘냉난방 분야에 혁명을 일으키면 커다란 수요가 발생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혁명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으켜야 할까. 여기서도 출발점은 사장님의 감각이었다. 테라오 겐은 생각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시원함을 선풍기로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여기서 지금까지의 발뮤다를 지탱하는 성공 공식이 태어난다. 기계를 통해 기분 좋은 느낌을 재현한다. 기계로 인간의 기분을 좋게 한다니 말이 쉽지 무척 어렵다. 무형의 사유에서 유형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게 테라오 겐이 이끄는 발뮤다의 핵심 역량이다. 그린팬은 무형의 사유->유형의 제품이라는 발뮤다 매직이 성공적으로 구현된 첫째 예다.


무형의 사유와 유형의 제품 사이에는 현장에서 쌓은 디테일이 있다. 발뮤다의 창의력은 끊임없는 관찰과 시도에서 나온다. 그린팬이 나온 흐름이 증거다. 자연의 바람을 만들기 위해 테라오 겐은 먼저 유체역학과 날개의 형상에 대한 책을 보았다. 자연풍을 만드는 법은 쓰여 있지 않았다. 다음에는 풍속계를 들고 자연풍 데이터를 모았다. 기존 선풍기 바람의 움직임도 연구했다. 힌트는 현장에서 찾았다. 테라오는 자주 다니던 공장에서 선풍기를 공장 벽에 틀어둔 장면을 떠올렸다. 바람이 벽에 부딪히며 바람의 소용돌이가 깨졌다. 깨진 바람이 부드럽게 돌아와 자연풍의 촉감을 냈다. 선풍기로 어떻게 바람을 깰까? 그 힌트는 ‘초등학생 30인 31각’에서 찾았다. 30인 31각은 2인 3각을 30명이 하는 경기다. 맨 마지막에 도착한 학생 기준으로 기록이 남는다. 테라오 겐은 떠올린다. 느린 아이를 중심으로 열이 모이는 것처럼 바람도 빠른 바람이 느린 바람에게 끌려가지 않을까. 발뮤다식 좌충우돌 영감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진짜 대단한 건 예상 밖의 혼합에서 태어난다. 스티브 잡스는 시리아계 아시아인과 미국 백인의 친자로 태어나 샌프란시스코의 블루컬러 가정으로 입양되어 히피 문화와 인문계 교육과 전자공학이 득세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함께 받은 기묘한 인류학적 혼합물이다. 테라오 겐의 통찰도 계통적으로는 미심쩍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정답이었다. 회전 속도가 다른 바람을 동시에 발생시키면 빠른 바람이 느린 바람에 끌려들어가 부드러운 바람이 만들어진다. 테라오가 처음 떠올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기분 좋은 시원함’이 구현된다. 


발뮤다 그린팬. 테라오 겐의 도박이 성공했다.

그린팬에서 나타난 발뮤다의 개발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은 계속 반복된다. 정리하면 대충 이렇다. 
1)사장님의 주도로 회사가 만들고자 하는 물건을 생각한다.
2)그 물건이 줄 수 있는 기분 좋은 막연한 느낌을 떠올린다. 그 막연한 느낌을 기계로 구체화하는 게 프로젝트의 목표가 된다.
3)막연한 느낌을 구체화하기 위해 현장을 관찰한다.
4)현장에서 답을 찾아낸다.
5)현장에서 찾아낸 답을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술로 구체화한다.
6)원가와 단가 등 현실적인 요소와 디자인 등 이상적인 요소를 두루 종합해 제품화한다. 


그린팬 이후 나타나는 발뮤다의 성공 패턴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글의 맨 앞에서 다룬 발뮤다 더 토스터의 경우도 기술은 다르지만 흐름이 비슷하다.
토스터를 만들기로 한다(만들고자 하는 물건 생각).
맛있는 빵이라는 요소를 재현하기로 한다(막연한 느낌).
어느 비오는 날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먹다 우연히 구워본 빵이 맛있는 걸 확인한다. 시행착오 끝에 유명한 빵집에 간다(현장 관찰).
스팀 기능이 있는 전기 가마를 찾아낸다(비바! 현장에서 답 발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 끝에 스팀 기능으로 빵을 굽는 하드웨어적 기술을 만들고 소프트웨어적 패턴을 구축한다(기술 구체화).
아르옌 로벤의 드리블 돌파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득점 패턴은 예상할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 발뮤다의 제품 개발 흐름은 예상 가능하되 늘 히트를 하는 영역에 이르렀다.


발뮤다의 성공 공식 중 대량생산이 가능한 정도의 기술 구체화는 좀 더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기술을 새로 만들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정도로 대중화시키려면 연구와 개발이 필요하다. R&D에 속할 이 부분을 소규모 회사가 하기는 쉽지 않다. 연구개발은 비용 대비 효과 산출이 잘 되지 않는 중장기형 설비투자 영역이다. 발뮤다가 아무리 혁신적인 회사라고 해도 직원 50명짜리 회사에서 도에 넘는 연구개발에 인적자원이나 금액을 지출할 순 없다.  


여기서 발뮤다는 다이슨과 흥미로운 대조군을 이룬다. 둘의 뿌리는 전혀 다르다. 다이슨은 모태가 기술인 회사다. 다이슨의 모태는 제임스 다이슨이 인생을 걸고 개발한 먼지봉투 없는 고성능 진공청소기 기술이다. 다이슨은 아직도 매출의 30% 정도를 기술개발에 투자한다. 이들의 기술 핵심은 전기 모터의 회전력을 극대화시키고 다각화시키는 기술이다. 진공청소기, 선풍기, 헤어드라이어, 모두 전기 모터를 회전시켜 바람을 불거나 빨아들이는 기술이다. 다이슨에게는 기술적 일관성이 있다. 


현재 발뮤다의 모태는 쾌감의 재현이다. 기술은 쾌감을 재현하는 수단으로의 역할에 충실하다.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 지친 외국 여행에서 먹었던 빵의 눈물 날 정도로 맛있는 맛, 이런 쾌감을 기계와 기술로 재현하는 게 지금 발뮤다의 본질이다. 발뮤다와 다이슨은 프리미엄 가전의 사례로 함께 언급되지만 둘은 본질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교집합이 생긴 것에 더 가깝다. 


쾌감을 재현하기 위해 기술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발뮤다는 이 한정된 상황을 동물적 순발력으로 극복한다. 발뮤다에게는 ‘만들면서 고안하고 개발한다’는 독창적인 흐름이 있다. 개발과 고안과 생산은 큰 회사에서라면 따로 진행하는 게 효율적이다. 발뮤다는 저 셋을 분리할 만큼 크지는 않다. 불리할 수도 있는 상황을 발뮤다는 멋지게 역전시켰다. 모든 직원이 서로의 일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하며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테라오 겐은 큰 책상을 하나 만들고 거기 전 직원을 앉히기도 한다. 서로의 영역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현재 환경을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하기. 발뮤다 특유의 통합적 완성도가 나올 수 있는 배경이다. 막대한 개발비가 드는 시제품 생산은 3D 프린터로 해결해 비용과 시간을 줄인다. 가전제품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동남아시아 등 제 3국에서 생산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일본에서 생산해 숙련공의 솜씨를 활용한다. 쾌감을 재현한다는 발뮤다의 막연한 흐름 속에는 현장에서 쌓은 동물적인 순발력과 판단력이 있다.


초기 발뮤다의 캐릭터는 노트북 스탠드를 만들던 니치 럭셔리였다. 지금의 발뮤다는 그때에 비하면 더 많은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프리미엄 가전 회사다. 테라오 겐의 DNA이자 발뮤다의 난자와도 같은 예민한 감각은 지금까지 일관적이다. 거기 더해 지금의 발뮤다를 잉태한 정자같은 요소가 하나 더 있다. 테라오 겐의 본능적 융통성, 혹은 융통적인 본능이다.  


테라오 겐이 융통성을 찾은 계기는 불황이었다. 불황이라 물건이 팔리지 않을 때 그는 “이상적이라 여기며 만든 제품과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이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의 장인이라면 세상을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시장을 미워하는 사람은 살아남은 적이 없다. 테라오 겐은 깔끔하게 본인의 방침을 바꿨다. 자기가 원하는 제품을 개발하는 것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제품을 개발하기로.

 

테라오 겐이 융통성을 발휘한 부분은 한둘이 아니다. 발뮤다 디자인의 상징 중 하나였던 초록색 인디케이터는 디자인상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을 듣고 빼버렸다. 그린팬의 후속 모델인 그린팬 S를 만들며 떠올린 이야기에서도 그의 융통성이 드러난다. “전에는 ‘어떻게 하면 모던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고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런 집착을 버리고 ‘적절’하면서도 ‘보편적’인 디자인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생각을 떠올리는 것보다 자기가 하던 생각을 버리는 게 훨씬 어렵다. 발뮤다의 융통성은 정말 뛰어난 자질이다. 융통성이 있어야 일관성이 더욱 빛날 수 있다. 


발뮤다 그린팬 S. 초록색 인디케이터가 빠져 있다. 고집은 부리기보다 버리는 게 더 어렵다. 


테라오 겐은 스스로의 위치와 역할도 유연하게 계속 바꿨다. PC 주변제품을 만들던 시절의 테라오 겐은 모든 걸 총괄하는 장인에 가까웠다. 그가 어릴 때 하던 밴드 음악으로 치면 레니 크래비츠같은 전천후 세션 겸 프론트맨이다. 여러 일을 겪으며 테라오 겐은 브랜드의 모토를 바꿨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것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그는 자신이 하던 걸 내려놓기 시작했다. 디자인을 디자이너에게 맡겼다. 지시도 추상적으로 변했다. 스스로의 일도 제품의 품질 확인이나 예산 편성 같은 분야로 넘어왔다. 프론트맨에서 레이블의 프로듀서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발뮤다의 색은 충분히 낼 수 있다. 경영에서 제이-Z나 윤종신 같은 포지션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금까지 발뮤다는 가전에 통용되던 규칙을 계속 뒤집어왔다. 백색가전은 제품보다는 브랜드의 이름값이 더 중요했다. 성능이나 디자인이 아니라 유통망과 가격이 판매를 결정했다. 발뮤다는 상대적으로 비싼 물건을 만드는 무명 브랜드였지만 성능과 디자인과 제품의 가치를 통해 시장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작은 회사는 가전에서 성공 못한다, 선풍기나 밥솥이나 가습기에는 더 이상의 혁신이 없다, 시장의 상식이었다. 발뮤다는 감각과 융통성으로 상식의 천장을 깨뜨렸다. 동시에 발뮤다의 라인업을 보면 딱히 방향성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선풍기 다음엔 토스터, 토스터 다음엔 밥솥, 밥솥 다음에는 뭐가 나올지 알 수 없다. 


융통성과 유연성 어딘가에는 브랜드의 축이라 할 만한 일관적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 감각을 간직하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발뮤다의 지향점은 딱 하나다. 인간의 오감에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것. 멋진 디자인으로 인한 시각적 자극이든, 묵직한 플라스틱 소재의 기분 좋은 촉감이든, 토스터의 뚜껑이 열리고 빵이 나왔을 때의 강렬한 후각적 자극이든. 소비자의 감각을 기분 좋게 자극한다는 게 발뮤다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제품으로 구현하는 소프트 포르노라고 한다면 말은 좀 그렇지만 이게 사실이다.


전략과 방향이 따로 없다는 것이야말로 발뮤다의 전략과 방향이며 가장 큰 장점이다. 예민한 감각을 세우고 시장의 흐름을 읽은 후 사람들에게 쾌감을 줄 수 있는 최선의 방향을 찾는다. 모든 오늘은 어제와 다르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산업을 둘러싼 거의 모든 조건이 변하면서 기존의 답은 더 이상 지금의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럴 때는 발뮤다처럼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작은 회사의 모델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테라오 겐은 그 사실을 잘 안다. 발뮤다의 미래에 대해 그가 한 말은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지만 더없이 정확하기도 하다. 


“스페인에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의 감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죠. 지금은 가전제품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만, 사실 발뮤다는 자유롭습니다. 어떤 사업이든 진행할 수 있고, 선택지는 무궁무진해요. 심지어 레스토랑을 운영할 수도 있습니다. 20년 후의 발뮤다는 어떤 모습일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감각을 간직한다는 것, 자유롭다는 것. 발뮤다의 핵심 요소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앞으로의 발뮤다가 어떻게 될 지는 몰라도 론다에서 눈물을 흘리며 빵을 먹던 소년의 고생에 긍정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소년의 꿈이 가전으로 이루어진다니 그야말로 일본 만화 같은 결말이다.




매거진 B 발뮤다 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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