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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Nov 09. 2017

이코노미 클래스에서의 쓰기

화장실에 가기는 힘들겠지만


모처럼 쓰기라는 주제의 원고니까 아껴 쓰던 내 소중한 필기구를 써볼까 한다. 서랍 속 깊숙한 곳에 아버지가 쓰던 펠리칸 만년필과 만년필 잉크가 잘 먹는 벨기에산 종이로 만든 노트를 꺼낸다. 아날로그 분위기에 맞춰 음악도 LP로 들어볼까. 책장 옆 LP장에서 빌 에반스의 <왈츠 포 데비>를 턴테이블에 올린다. LED 조명도 오늘은 끄고 옛날 분위기의 백열등 스탠드를 켜 볼까. 이제 쓰기에 대한 글을 제대로 쓸 분위기가...


거짓말이다. 지금도 늘 쓰던 세팅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폰트 크기 10과 맑은 고딕에 맞춰 키보드를 두드린다. 요즘은 액셀이나 파워포인트로도 원고를 만든다. 문단별 글자수를 볼 때는 액셀을 쓴다. 문단을 앞뒤로 배치해서 리듬을 만들 때는 파워포인트를 쓴다. 글상자 하나당 한 문단으로 맞춰두고 이리저리 앞뒤로 돌려 본다. 지금 원고의 배경음악은 인터넷 라디오 앱으로 듣는다. 캘리포니아에서 송출하는 70년대의 일본 가요다. 이 집의 모든 조명은 LED 전구다. 아버지가 물려준 만년필은 없다. 내가 사는 집에는 서랍도 없다. 


'쓴다'는 단어 자체가 머쓱하다. '(사람이 글씨를)연필 등으로 획을 그어 모양을 이루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 나온 쓰기 항목의 첫 정의다. 누가 요즘 이렇게 '쓰기'를 할까? 종이 위에 필기구로 획을 그어 모양을 적을 때는 전화하면서 낙서할 때뿐이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거의 모든 문자나 활자 텍스트는 키보드를 입력해 스크린에 띄우는 글자 모양의 그래픽이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현대 쓰기의 정의도 내리긴 했다. '(사람이 글을)작성하여 이루다.' 하지만 저장 항목에 표시된 플로피 디스크 모양처럼 상징적인 뜻이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전통적인 쓰기를 하지 않는다. 


기술이 바꾼 삶의 여러 요소에는 의사소통 방식도 포함된다. 인류는 쓰기를 버리고 초고속 입출력 전달 체제로 들어섰다. 몇십 년 전만 해도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모르스 부호 정도였다. 조금 전에 당신이 무심코 눌러본 단체카톡방 속 동영상은 정말 대단한 기술적 성취다. 


정보의 모양 뿐 아니라 속도까지 변했다. 홍콩의 초기 총독은 멀리 떨어진 런던의 뜻과 달리 움직일 수 있었다. 왕실의 명령이 우편 선박을 통해 왔기 때문이었다. 본국에서 무역 시설을 확충시키라고 전달하면 몇 달 후에 그 명령이 홍콩으로 하달됐다. 현지 책임자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이 판단해 치안을 확충하거나 본국에게 보고하지 않고 영국인 관리 대신 현지인 관리를 뽑을 수 있었다. 트럼프가 트위터에 올린 말이 전 세계에서 바로 분석 대상이 되는 지금과는 다르다. 


기술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일단 초고속인터넷에 접속하면 느린 인터넷을 쓰고 싶지 않다.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지역도 점점 늘어난다. 문명권이라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는 지역이 거의 없다.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지만 출구는 많지 않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많이 모여 산 적도,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정보에 노출된 적도 없다. 인류학자 김산하는 인터뷰에서 지금을 초자극 상태라고 표현했다. 초자극. 정보의 초자극에서 벗어날 안전지대가 없다. 그 덕에 늘 피곤하다. 우리는 이동통신사에게 한 달에 몇 만원씩 주고 피로해질 권리를 자청해서 구매한다. 


비행중의 기내는 몇 안 되는 인터넷 안전지대다. 유료 와이파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항공사가 생겼지만 아직은 사용 비율이 낮다. 기내 인터넷이 안 되어서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 공항버스와 면세점을 지나 게이트 직전에서까지 소모적인 업무 연락을 하다가 "저 이제 비행기 탑니다"라는 말과 함께 노트북을 닫아버릴 때 상쾌함을 느꼈던 사람이 나 뿐일까. 


비행기에서 엽서를 주던 때가 있었다. 보통 엽서보다 조금 더 뻣뻣한 종이에는 각 항공사의 비행기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2010년대 초 루프트한자 비행기 엽서는 특히 훌륭했다. 루프트한자 비행기 엽서가 찍은 건 단순한 자사 비행기가 아니었다. 격납고 속의 항공 설비, 프레임 안에 가득 찬 보잉 747의 제트 엔진, 활주로를 돌아나가는 A380의 앞모습, 비행기라는 현대 문명의 성취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였다. 아직 승무원에게 요청하면 대부분의 항공사에서 엽서를 주지만 엽서를 준다는 서비스 자체를 모르는 승무원도 있을 수 있다. 세상이 그만큼 변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쓸 수 있다. 지금이라도 종이에 손으로 편지를 쓰면 된다. 다만 편리한 대체품이 있을 때는 절실해지지 않는다. 편지를 쓰다 스마트폰을 들고 "나 지금 너한테 편지써. 궁금하지?" 라고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세상이다. 기내 편지가 특별한 이유는 거기선 정말 손으로 쓰기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축구의 아름다운 발기술은 손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났다. 손으로 쓴 편지의 절실한 아름다움도 의사소통 수단이 그것뿐일 때 온다. 식탁도 되고 테이블도 되는 이코노미 클래스 안의 작은 공간이야말로 21세기의 글쓰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비행기 안에서 편지를 많이 써봤다. 장거리 비행의 이코노미 클래스에서는 독서등을 켜기도 눈치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맨 뒤로 가서 벽에 대고 편지를 썼다. 종이가 없을 때는 구토 봉투에도, 보잉 737 비상탈출 안내문에도 편지를 썼다.  하늘 위에서 떠오른 그 말을 까먹기 전에 너에게 하고 싶어서. 얼마나 보고 싶은지, 우리는 얼마나 더 잘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그때의 나는 정말 썼다. 종이에 볼펜으로 획을 그어 문자 모양을 만들며 남에게 볼 수 있는 마음의 기록을 만들었다. 그때 그렇게까지 편지를 썼던 여자들과는 다 잘 안 됐다. 하지만 그렇게 절실하게 썼던 기억이 있는 게 어디냐고 생각한다. 


종이에만 낭만이 있다는 말은 더러운 거짓말이자 완전한 오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면 안 된다. 그 말은 종이 이전의 문자 매체였던 양피지와 석판에게도 큰 실례다. 사람은 어디에서든 낭만을 찾아낼 수 있는 재능이 있다. 낭만은 페이스북 댓글과, 읽지 않은 카톡 메시지 옆의 1에도 있다. 하지만 종이에만 있는 낭만이 있다는 말은 너무 맞다. 빈 종이에 필기구를 들고 팔을 움직여 여백을 줄여나갈 때만 생기는 자극이 있다. 그 자극에 대한 반응처럼 드는 이런저런 생각이 있다. 인터넷이 안 되니 인스타그램도 네이버 최신뉴스도 볼 수 없이 손바닥만한 저해상 모니터만 있는 이코노미 클래스 테이블에 빈 종이를 펴 보면 알 수 있다. 쓴다는 행위가 어떤 자극이 되는지. 손을 움직여 문자를 만들어낼 때 얼마나 내밀한 속마음이 딸려 나오는지. 믿기 어려우시다면 다음에 비행기를 탈 때 한번 종이 위에 뭔가 써 보시길. 누군가에게 쓰는 편지든, 자기 자신에게 쓰는 말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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