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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Aug 28. 2015

책과 코펠

좋은 책은 좋은 여행용품이 될 수 있을까

다시 5년 전 일이다. 리장 다음에 간 출장지는 인도네시아 발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견문이 모자라서 발리 했을 때 떠오르는 건 변별력 없는 리조트와 <발리에서 생긴 일>밖에 없었다. 나는 그 드라마를 안 봐서 발리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직접 가본 발리는 내 편견보다 훨씬 재미있고 아름다웠다. 더운 기후와 힌두 문화와 호주 사람이 묘하게 평화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가장 인상 깊던 곳은 헌책방이었다. 곳곳마다 서점이 문을 연 채 지난 에디션 론리 플래닛과 각국의 서양 언어로 된 헌책들을 쌓아두고 있었다. 세계의 여행자들은 계속 책을 읽으며 앞으로 나가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딘가 갈 때 책을 챙겼다. 늘 내 여가시간에 다 읽을 수 없을 만큼의 책을 넣었다. 금방 다녀올 건데도 출발하기 전 기름을 가득 채우는 것처럼. 그러다 보니 여행 다닐 때 좋은 책에 대한 실험적 경험이 쌓였다. 종이 책은 훌륭한 여가선용 매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여행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더욱, 특히 하드웨어적 측면에서.


종이 책은 작고 가볍다. 당신이 늘 비즈니스클래스를 타고 짐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호텔만 다닌다면 <로마 제국 쇠망사>전권을 넣어 가든 풀 컬러 양장본 <페르시아의 카페트 무늬>같은 걸 챙기든 상관없다. 하지만 배낭을 매고 버스를 타는 여행을 하거나 최저가 검색으로 사서 두 번 환승해야 하는 외항사 노선의 이코노미 클래스 복도에서 "익스큐즈 미"를 400번쯤 말해야 내 자리에 앉을 수 있다면 책의 크기는 중요하다. 이코노미클래스의 기내지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는 얇아야 여러 모로 편하다.


가혹한 환경에 잘 견딘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책은 구조가 간단하므로 다른 여행용 여가용품에 비교하면 굉장히 튼튼하다. 2층에서 떨어뜨려도 부러지거나 깨지지 않는다. 물에 젖어도 모양이 변할 뿐 안의 내용물을 식별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빛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읽을 수 있으므로 전원도 필요 없다. 종이책의 경쟁 상대인 각종 전자기기가 아직 여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가격도 저렴하다. 잘 고르면 1만원 내외로 몇 번씩 읽어도 안 질리는 책을 살 수 있다. 저렴하기 때문에 부담도 덜하다. 어디 두고 오거나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으면 안타깝겠지만 사실 큰 문제까지는 아니다. 아이폰 6나 비앤오 A2를 잃어버리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기술 혁명을 무시하거나 옛날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다. 종이 책은 인터넷 접속도 안 되고 동영상도 못 보고 생생한 재미도 떨어진다. 하지만 21세기 초반 현재 이 정도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여행용 여가 기기 중 이 정도의 편의성을 가진 하드웨어는 종이책뿐이다. 그리고 여행은 본질적으로 비일상적이며 특수한 환경이다. 그런 환경이라면 평소보다 조금 더 불편할 수도, 평소와는 다른 장점이 필요할 수도 있다. 스타우브와 코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지만 냄비라는 목적과 본질은 같다. 평소의 여가용 기기와 종이 책도 비슷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내게 좋은 여행용 책의 조건은 확실하다. 가능한 한 작고 가볍고 얇고 저렴했으면 좋겠다. 글자가 작거나 자간이 좁아서 단위 면적 대비 정보량이 최대한 많았으면 좋겠다. 나는 허영이 있으므로 표지도 예뻤으면 좋겠다.


여기까지는 하드웨어로의 책 이야기지만 소프트웨어도 중요하다. 책은 내용을 읽는 거니까. 개인적으로는 잘 읽히고 재미있는 책을 좋아한다. 잘 읽히게 쓰는 거야말로 작가의 소중한 재능 중 하나다. 거기에 더해 가능하면 몇 번을 읽어도 새로운 면이 나오는 책이었으면 좋겠다. 훌륭한 문학이나 논픽션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출장 같은 경우에는 오래 집중해서 책을 읽기 어려운데, 그럴 때는 곧장 내용에 진입할 수 있는 단편집이 좋았다.


아쉽게도 내 모국의 서점에 깔린 책은 방금 제시한 기준의 완벽한 반례에 가깝다. 표지부터 불편하다. 요즘 나오는 많은 책이 양장본이다. 양장본 때문에 표지가 두꺼워지고 코트 주머니나 가방 앞주머니에 넣기도 힘들어진다. 표지가 얇으면 어느 주머니에든 구기거나 말거나 해서 넣는 식으로 수납 방안이 더 다양해진다. 내지를 보면 책 대부분이 글자가 크고 자간과 줄간도 넓다. 이런 책을 여행지에 챙기면 쓸데없는 여백까지 내 짐에 넣어 가는 것같다. 표지는 뭘 참고 삼아 누가 만들고 결재를 내리길래 그렇게 안 예쁜 걸까. 비행기 위생봉투로 감싸는 게 더 좋을 책이 한두 권이 아니다. 내가 괴팍하고 허영심 있는 소비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걸 사고 싶다. 좋은 모국어 문고본을 쥐고 공항으로 향하고 싶다.


방금까지 이야기한 기준을 따라 모국어 책을 찾다 보니 의외의 상품군에 들어가게 됐다. 헌 문고본과 추리소설. 한국도 약 20여 년 전까지는 좋은 문고본이 많이 나왔다. 부산 보수동이나 서울 신촌의 헌책방에서 그런 책을 사왔다. 모파상의 단편집이나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같은 책은 짧은 여행이면 몇 번씩 가져가서 읽었다. 추리소설은 정보량이 많고 표지가 그럴싸하며 내용이 깊은 책 중 신간으로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모국어 서적 장르다. 해문과 동서문화사는 둘 다 훌륭한 추리소설 전집 목록을 갖추고 있다. 원전이 정확하지 않기도 하고 읽다 보면 이게 중역인지 혼역인지 헷갈리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자칼의 날>이나 서머싯 모옴의 <어센덴>, 로스 맥도날드의 <움직이는 표적>은 작은 판형과 얇은 두께로 나와 있으며 몇 번씩 읽어도 즐거울 정도로 훌륭하다.


나는 아직도 여행지에서의 책을 생각하면 5년 전의 첫 직장에서 다닌 출장들이 생각난다. 발리의 헌책방을, 도서관을 마련해둔 채 손님들이 읽다 두고 간 책들을 모아 둔 바닷가의 리조트를, 싸구려 파라솔 아래에서든 값비싼 호텔 풀사이드에서든 뭔가 읽고 있던 사람들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게 가장 기분 좋은 여행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디서든 늘어져서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책을 하루 종일 읽는 것이다. 전화기는 돌아갈 때까지 에어플레인 모드로 설정해둔 채. 뭐 언젠간 그런 여행을 갈 수 있을 지도 모르지. 5년 전의 발리에서도 미래의 내가 이런 원고를 쓸 지는 몰랐으니까.






+다음에는 좋은 여행 기념품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휴가철이 다 갔네요. 다른 좋은 물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하던 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이번 원고부터 존대 대신 보통 어투를 쓰기로 했습니다. 사실은 좋은 오빠가 아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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