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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Jul 17. 2024

내키는 대로

바르셀로나 

그라나다에서 오후 2시에 떠난 기차는 거의 밤 9시나 돼서야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저녁을 늦게 먹는 국민이고 대도시라 바르셀로나의 밤은 대낮처럼 밝았다. 나는 녹초가 되어서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시골 정경을 구경하다 자다 했는데, 친구는 그라나다에서부터 오는 내내 숙소 주인과 연락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리고 간신히 연락된 주인은 갑자기 숙소에 물난리가 나서 공사한다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다. 친구가 심사숙고해서 좋은 위치로 정했는데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새 주소를 찾아 도착하니 아파트 앞에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조금 불안해졌다. 그런데 아파트 주민인듯한 한 청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는 우리에게 “뭐 도와줄까” 하고 물었다. 우리는 그에게 집주인과 통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뭐라 뭐라 스페인어를 하더니 조금 기다리면 누군가 온다고 전해주었다. 우리는 이방의 젊은이를 믿고 아파트 로비에서 얌전하게 기다렸다. 정말 조금 기다리니 미안하다면서 열쇠를 가진 여자가 왔다. 우리는 늦게라도 아늑한 숙소에 들어왔고, 타지에서 받은 인상 좋은 청년의 친절이 기분 좋아서 많이 따지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의 첫날은 내키는 데로 걸어 다니면서 보내기로 정했다. 카탈루냐 광장 근처에서 브런치를 먹고 람블라스 거리를 걸었다. 기념품 가게와 꽃가게, 식당이 즐비하고 관광객이 줄을 서서 걸었다. 우리는 무언가 빼앗길까 봐 걱정되어 앞으로 맨 가방을 꼭 움켜쥐었다. 조금 걸어가자 콜럼버스 동상과 항구가 나타났다. 스페인이 한때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해 준 콜럼버스. 그의 동상은 스페인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라나다 시내 중심도 이사벨 1세 여왕에게 무릎을 꿇은 콜럼버스 중심으로 물이 치솟는 커다란 분수가 차지하고 있다. 포트 벨에 있는 콜럼버스는 손가락으로 첫 원정을 떠난 마요르카를 가리키고 있다. 평온한 항구에는 셀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요트가 묶여서 미풍에 살짝살짝 흔들렸다.

몬주익성 같은 관광지가 있지만, 우리는 피카소 미술관이 있는 고딕 지구로 향했다. 고딕 지구는 고딕 시대의 건축물은 아니지만,  들어서자마자 우중충한 중세의 분위기가 흘렀다. 고풍스러운 골목길을 둘러보다가 우리는 그중 하나의 건물로 들어섰다. 그런데 입구에서 티켓을 보여주니 내가 예약한 미술관이 아니라고 했다. 왜 다른 미술관으로 예약이 되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우리는 발길을 돌려 예약을 한 미술관으로 서둘러 걸었다. 

다시 돌아온 카탈루냐 광장에는 세상 모든 비둘기가 모인 것처럼 새가 많았다. 발을 디디면 새는 푸드득 거리며 길을 비켜주었다. 친구는 비둘기가 무섭다며 멀리 돌아왔다. 그리고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실수로 예약한 “금지된 작품 미술관”(Museo del Arte Prohibido)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그동안 검열에 걸려 ‘제대로 된’ 미술관에서 쫓겨난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피카소 미술관을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브의 사과’처럼 짜릿함을 줄 평범하지 않은 작품을 볼 기대에 오히려 가슴이 설렜다. 

우리의 인식은 진실위에 덮어씌운 하나의 망과 같다. 원래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인식의 망을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한다. 많은 사람이 '정상적'이라 믿는 인식의 망을 통해 보지 않고 자기만의 틀을 만들어 독특한 표현을 한 예술가의 작품은 보기가 불쾌하거나 심지어는 역겨울 때도 있다. 그러나 기존의 종교, 정치, 관습을 버린 이 미술관의 작가들은 또 다른 시각으로 우리의 뇌를 흔들어놓았다. 우리는 여느 미술관에서는 보기 힘든 작품을 보면서 재미있어서 웃거나, 의미가 깊어 진지하거나, 가감 없는 현실에 슬펐고, 가끔 민망해서 또 웃었다. 우리가 놓친 피카소나 뱅크시, 아이웨이웨이 같은 세계의 이름난 작가와 우리나라 작가 김서경, 김운경 작가의 ‘소녀상’까지 모든 작품이 흥미롭고 놀라웠다. 

생각이 복잡해지는 눈요기를 해서 숙소로 걸어오는 길에 모리츠 맥주를 만드는 식당에 들러 머리를 식혔다. 물이 달아서 포도주, 맥주 같은 술이 맛있다고 소문난 나라다. 우리는 간단한 타파스와 하얀 거품이 알맞게 덮인 노란 맥주를 시켜 마셨다. 맥주는 금지된 작품처럼 쿨한 맛이었다. 

저녁 식사로는 마트에서 고기와 채소, 과일 같은 재료를 푸짐하게 사 와서 사연은 많았지만, 만족스러운 숙소에서 요리해 먹었다. 재료가 신선해서 올리브유와 소금만으로도 음식이 맛있었다. 삶이 수첩에 적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아는 나이이기도 하지만, 여행하다가 계획하지 않았던 뜻밖의 경험으로 실망하기보다 더욱 기쁘고, 감사했다. 바르셀로나의 첫날 밤은 그래서 더 환하고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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