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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Jul 15. 2024

남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한때 목숨을 걸고 무엇인가 지켰고 늘 ‘헥멩가로서 사는’ 비전향 빨치산 출신의 아버지. 딸은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음을 들었다. 장례를 치르면서 자식이 몰랐던 아버지의 지인들을 만나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작가는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 아버지가 이해타산 없이 도와준 사람들의 사연 속에서 아버지는 그저 따뜻한 ‘인간’이었다. 아버지는 어떤 세상이 오기를 간절하게 바랬을까. 작가는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되면서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을 찾아낸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것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붉게 물들었던 숭고하게 아름다운 지리산을 배경으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과 역경에 맞서서 살아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현란한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전해진다. 지금은 옛 화폐 같이 낡은 이념 투쟁이나 사상 실현이 한 때는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결국 그 또한 자식이 좋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하는 아버지의 욕망이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의 아버지들이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치열한 자본주의의 정글에서 무슨 일이든 다하는 것처럼.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페터 데바우어와 그의 아버지

주인공과 할아버지의 추억에서 긴 이야기는 시작한다. 페터는 할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충만해서 아버지의 부재를 메꿨다고 생각했다. 방황했지만, 아버지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결혼 신고를 하며 알게 된 아버지의 비밀. 주인공은 피하지 않고 아버지의 죄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핏줄이라고 신파에 빠지거나 주저하지 않고, 용서나 화해도 없고,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정당하게 단죄한다. 그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꼭짓점으로 죄와 책임의 문제를 묻는다.’ 그리고 방황하던 그의 삶은 균형을 잡는다. 

어느 평론가가 ‘감정의 고고학자’라고 했듯이 작가는 유물을 조사해 분석하는 고고학자처럼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 무엇인가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관찰하고 묘사한다. 그래서 소설인지 자서전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혼란했던 동서독의 정치 상황과 서독인으로서의 경험, 개인적인 생각과 객관적 사실을 혼합하여 잘 만든 전기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소설에서는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온갖 모험을 하는 오디세우스를 자주 인용하고 비교하였지만, 작가에게 아버지는 돌아가야 할 고향이 아니라 정복해 넘어가야 할 산이었다. 사실 남자에게 아버지는 높은 산이다. 그래서 그 그림자 밑에서 살아가든가 아니면 넘어가 우뚝 서든가 해야 한다. 특별히 남자라고 한 것은 우리가 가부장제의 위력이 강력했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지만, 아들과 딸 모두에게 아버지는 태산 같은 존재이다. 작가는 아버지를 찾아내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죄를 직시하고 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역시 그늘을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의 자리

“내가 교양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일을 마쳤다.” 작가는 프랑스 시골에서 작은 식당 겸 식료품점을 했던 아버지의 ≪자리≫(la place 소설의 원제이다)를 떠나 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돈을 벌지 않는 딸이라 눈총을 받았지만, 아버지가 죽도록 노동만 하던 노동자의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가게 주인이 된 것처럼 딸은 아버지의 출신을 벗어나기 위해 ‘지식인’이 되었다. 작가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만의 ‘자리’를 찾으려고 싸웠던 개인의 역사를 담담하게 묘사한다.

이 소설 아닌 소설은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처럼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시작한다. 그러나 글쓰기의 동기가 다르다. 아버지를 배신한 딸의 죄책감이 작가가 글을 시작한 이유였다. “글쓰기란 우리가 배신했을 때 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라고.”(장 주네) 소설 첫머리에 인용했다. 

아니 에르노는 경험한 것만 쓰는 작가이다. 사진과 메모를 찾아 기억을 떠올려 쓰는 그녀의 글은 오래된 앨범처럼 흐릿하지만 생생하다. 작가는 아버지의 삶과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날실과 씨실처럼 엮어 아버지의 ‘자리’라 이름 붙였다. 노벨상 수상 작가의 아버지는 이렇게 박제가 되었다. 그런데 딸은 글쓰기로 아버지에게 ‘잘못’한 것을 정리할 수 있었을까.      

나의 아버지

아버지를 찾아 나를 찾는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나의 아버지가 맴돌았다. 어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 아버지가 알게 모르게 나에게 준 영향, 그리고 아버지의 인생. 

아버지는 아흔이 넘은 연세에도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한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사그라지지 않아 젊은 사람을 만나면 늘 질문을 하고 당신이 겪은 이야기를 한다. 나는 아버지의 반복하는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는데 요즘에는 귀를 기울이고 가끔 녹음도 한다. 아버지 세대의 모든 사람이 그랬듯이 전쟁과 빈곤을 이겨내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었다는 ‘태극기 부대’의 자부심과 공치사로 끝나지만,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의 이야기가 어느 역사소설보다 흥미진진하다. 위기의 순간마다 아버지는 살아남기 위해 최고의 선택을 했고 최선을 다했다.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좀 더 나은 공부를 하기 위해, 선진국의 학문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전공한 분야인 보험이 우리나라에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아버지는 전념을 다 했다. 

나는 아버지의 ‘desperate’한 삶의 자세(우리에게 하는 잔소리 중 하나)를 절대 좇아가지 못하지만, 무엇인가 집중하다 보면 아버지를 닮았나 하는 생각이 나서 혼자 웃는다. 필사적인 삶의 태도가 비웃음을 당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려웠던 시절에 살아가기 위해 ‘desperate’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노년을 그렇게 보내고 있다.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꾸만 들어도 가늠이 되지 않고 버거워서 글로 옮기기가 어렵다. 젠장, 소설 쓰기는 요원한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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